글을 시작하며
요즘 한국사에서 가장 치열했다는 시대인 후삼국에서 고려 초기의 역사를 다룬 태조 왕건이 사극의 열풍과 맞물려 큰 인기를 모으고 있습니다. 그동안 조선의 역사를 자주 보다가 고려의 역사를 새롭게 보려고 하니까 왠지 새롭고 어색한 점도 없지 않아 있습니다.
하지만, 모처럼 고려시대사를 다루는 드라마라니 정말 반가운 마음뿐입니다. 단, 왕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면, 인기에 영합하기 위해 말도 안되는 허구적 장면들이 가미된다는 사실입니다.
무릇, 역사를 다루는 드라마는 역사적 사실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전달이 뒷받침되어야 합니다. 이런 점에서 볼때 앞으로 고려나 그 이전의 시대를 다루는 드라마는 가뜩이나 부족한 사료를 이유삼아 허구적인 사실을 가미해서는 곤란하다는 사실을 직시해야 할 것입니다.
아무튼 그 이유에서 인지는 모르겠지만, 오늘날 우리 역사에 대한 관심에 있어서 고려에 대한 관심이 전에 비해 많이 높아진 것만큼은 부인할 수 없습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알고 있는 고려라는 나라는 어떤 나라일까요? 그 궁금증을 오늘부터 파헤쳐 나가고자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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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려의 성립과 후삼국의 통일
약 1천여 년의 긴 역사를 지닌 신라가 지배층의 내분과 신분제(골품제도)의 모순 등 여러가지 악재로 인해 점점 쇠퇴해 가고 있을 때, 지방의 호족 세력가운데 막강한 사병들을 보유한 세력들이 점점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합니다.
우리가 역사드라마 왕건을 통해 접한 바 있는 궁예 나 양길, 기훤, 그리고 (후)백제를 세우는 견훤 (진훤 이라고도 읽음) 등이 그 대표적인 예라 할 수 있습니다. 특히 이 가운데, 궁예와 견훤은 차츰 부각되어 궁예는 양길과 기훤등 경쟁 세력을 몰아내고 지금의 철원으로 도읍한 후 고구려의 뒤를 계승한다는 차원에서 후고구려 , 또는 고려라 일컬었습니다. (후일, 마진 으로국호를 바꾸었다가 태봉으로 다시 고침)
또한 견훤은 옛 백제의 땅을 중심으로 차츰 영역을 확대하여 세력을 키워 신라의 존재를 위협하게 됩니다. 이렇게 해서 북으로는 궁예의 후고구려, 서쪽으로는 견훤의 후백제, 그리고 동남쪽으로 신라가 정립하여 서로 치열하게 대립하는 국면이 되었습니다. 이것이 한국사에 있어서 가장 큰 혼란기였다는 후삼국시대가 열리게 되었습니다.
한편, 송악(지금의 개성)의 호족 출신으로 왕융(왕건이 고려 건국후 세조로 추존함)과 그 아들 왕건이 있었습니다. 이들은 궁예에 귀부하여, 특히 그 아들인 왕건은 궁예의 각별한 신임을 얻게 되면서 장수로서 많은 활약을 펼칩니다. 특히, 왕건이 수군을 이끌고 지금의 전라도 나주일대를 공격하여 점령한 것은 잘 알려진 사실 입니다.
이렇게 해서 치열하게 대립해 가던 후삼국은 한때 북부 정권의 집권자가 바뀌는 등 점점 과열조짐을 보이게 됩니다. 곧, 궁예가 왕권의 전제화를 위해 공포정치를 꾀하다가 호족들의 반발을 사 끝내 왕위에서 내몰려 비참한 죽음을 당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 궁예를 일부 호족들의 추대를 받아 무력정변으로 몰아내고 918년에 고려를 건국한 인물이 바로 태조 왕건 이었습니다.
태조는 궁예와는 달리 넓은 도량과 탁월한 정치력으로 선정을 배풀면서 궁예이후 흉흉했던 인심을 수습하였습니다. 또한 도읍을 자신의 근거지인 송악으로 옮김으로서 고려 475년의 역사의 기틀을 다졌던 것입니다.^
하지만, 일부 친궁예 세력과 왕건에 반감을 품는 일부 호족들을 아우르는 데에도 그만큼 진력을 쏟아야 했습니다. 그래서, 혼인정책과 사성정책등을 통한 회유책과 무력에 의한 강제 진압등 강경책을 적절히 구사하면서 호족들을 아우르고자 했습니다.
아울러 태조는 신라와 연대하고, 그 연대를 통해 견훤의 백제를 견제하는 이른바 친신라 반백제정책을 추진 하였는 바, 이것이 백제를 자극하여 고려와 백제의 정면 충돌을 부추겼던 것입니다. 고려와 백제의 대결에서 처음에 우위를 보인 것은 견훤이 이끌던 백제였습니다.
견훤의 백제는 초기의 여러 싸움에서 우위를 보위며 승승장구하더니, 급기야는 신라까지 쳐들어가 경애왕을 자결하게 하고, 경순왕을 옹립하지만, 끝내 신라를 합병하지 못하는 오판을 범했습니다. 고려와 백제 양자간의 대결이나 다를 바 없었던 후삼국에서 신라를 흡수하게 되면 그만큼 절대적으로 세가 유리하게 되어 있었던 것입니다.
따라서 견훤의 이 오판 하나는 후백제의 입장에서 보면 결정적인 치명타로서, 신라로 하여금 백제에 대한 반감을 노골적으로 높이고 오히려 왕건의 포용력으로 고려에 흡수되게 하여, 고려의 후삼국 통일에 결정적으로 유리한 결과를 가져왔습니다.
하지만, 태조의 고려군도 견훤에 의해 고전하기도 하였습니다. 한 때 태조가 적에게 쫓기는 위기에 몰리기까지 하였으나, 신숭겸과 김락의 분투에 의해 간신히 빠져 나오기도 한 적이 있었습니다. (공산 전투). 그러나, 앞에서 이야기 한 바와 같이, 견훤의 신라를 합병하지 못한 것은 곧 고려에게 결정적인 힘을 주어
지금의 안동지방인 고창에서 권행(원래 김씨였으나, 태조가 이 싸움의 공로로 안동을 식읍으로 주고 권씨 성을 하사하여 안동 권씨의 시조가 됨),김선평(안동 김씨의 시조),장길(안동 장씨의 시조)등 세 호족의 도움과 유금필의 분전으로 후백제를 크게 물리칩니다.
이후 후백제는 국력이 약화되어 내분에 휩싸인 끝에 왕위계승을 둘러싸고 견훤의 첫째 아들인 신검과 그 두 아우 양검, 용검은 이복 아우 금강을 죽이고, 다시 그 아비 견훤을 내쫓다시피 하였고, 견훤은 고려로 도망하여 스스로 자신이 세운 백제를 무너뜨리는 씁쓸한 광경을 연출합니다.
한편, 신라도 태조의 신라 방문을 계기로 급속도로 고려에게 복속화 되어 마침내 935년 경순왕이 스스로 나라를 들어 태조에게 항복하니, 박혁거세가 나라를 세운 이후 약 995년간 유지되어 왔던 신라 왕조는 종말을 고했습니다. 이때 항복을 반대하던 마의태자의 이야기는 너무나 유명합니다.
이로써 태조 왕건은 918년 건국한 이후 약 18년 남짓만에 후삼국을 통일하는 대업을 이루게 됩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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