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편없이 혼자 사는게 더 큰 전쟁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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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편없이 혼자 사는게 더 큰 전쟁이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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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으로 남편 잃고 50년을 혼자 산 박영순 할머니

^^^▲ 힐끗 돌아보며 ‘내 간다’ 한마디 하던 남편,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다. 53년전 그날도 남편(안기욱·당시 29세·평산경찰서 근무)의 영정을 어루만지고 있다.
ⓒ 배철현^^^
"남편 없어 서럽다고 울지도 못했어. 이 자식들 데리고 어떻게 살꼬 싶어 눈물도 안나더라"

6.25전쟁으로 남편을 잃고 50년을 혼자 산 박영순 할머니(77·용성면 당리리).

53년전 그날도 남편(안기욱·당시 29세·평산경찰서 근무)은 별 말없이 집을 나섰다. 얼굴도 못보고 첫날밤을 올린 터라 부부간의 정도 도탑진 않았지만 입 무거운 남편이라 평생 믿으며 살아도 된다 생각했다. 힐끗 돌아보며 ‘내 간다’한마디 하던 남편, 그게 정말 마지막이었다. 당시 5살난 큰아들(병일)과 뱃속 2개월된 작은 아들(병호)이 25살 새댁에게 남게 됐다.

모두가 먹고 살기 힘든 시절이라 시댁에서는 며느리 입 하나라도 줄일려고 자꾸만 박영순씨를 내쳤다. 남편 없는 설움도 컸지만 쫓겨나면 자식들 죽일까봐 악착같이 고된 시집살이를 견뎠다. 그것도 잠시, 결국 시골집 셋방으로 세 식구만 나앉게 됐다.

시골에서 내땅 없이 살려니 남의 밭 품앗이도 하고 야산을 일궈 채소도 키웠다. 하루 종일 일하고 야산에서 내려오면 깜깜한 밤중이 되서야 동네 논둑을 밟을 수 있었다. 못둑가를 걸을 때면 이대로 빠져 죽고도 싶었다. 그래도 집에서 굶고 있을 두 아들 생각에 마음 고쳐먹기가 수십번. 배고프다고 징징대는 아이를 달래기는 커녕 산에서 해온 나무작대기로 모질게도 때렸다. 사는 게 힘들어 화풀이 겸 아이를 때린 것이다.

채소를 길러 인근 자인시장에 내다 파는 생활이 계속됐다. 요즘에야 유족 지원금 70여만원이 나오지만 옛날엔 나랏님도 어려워 500원 1000원 받은 적도 있다. 아이들 도시락 반찬은 매일 무우말랭이. 박 할머니는 도시락에 달걀 한번 넙적하게 올려주지 못한걸 자식들에게 제일 미안하게 생각한다. 학비가 지원되는 데까지만 가방끈을 달아준 것도 늘 미안하다. 큰아들은 공장일을 하다 일찍 퇴직했고 둘때 아들 병일씨는 진량우체국에 근무한다.

"반들반들하는 자식새끼 눈 쳐다보면 악만 남는기라. 남편도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내 사는 것도 전쟁이었지"

가진 것 배운 것 없는 여자몸으로 두 아들을 데리고 여기까지 오는 고생길은 박 할머니 말대로 ‘글로 적으면 한 궤짝’ 감이다. 그러니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 몸 성한데가 한군데도 없다. 디스크에 골다공증, 거기다 악착같이 밭을 메던 흔적인지 손마디가 쭉 펴지는 데가 없다. 그러나 유가족은 상이군경과 달리 무료진료가 되지 않아 병원에도 잘 못간다.

"내 살아온 것 너무 힘들어서 자꾸 생각하기 싫다. 전쟁? 말도 하지마라. 그땀시 내가 이 고생 아이가

시골집을 개조하지 못해 할머니 집 변소는 푸세식이다. 마당을 가로 질러 가야하는데 몇번의 신음소리 끝에 겨우 일어서는 박 할머니. 전쟁의 상처는 53년이 지난 박 할머니의 허리에도 무릎에도 여전히 남아 있었다. 총부리에 채인 상처만이 아픈 것이 아니고 그로 인해 살아온 세월이 상처요 아픔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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홀 아비 심정 과부 2003-06-12 00:15:22
할머니 말씀이 이해가 가고 남습니다.그 속을 누가 다 알겠슨까 남은 생이라도 평안 하시기를 기원 드립니다.

건강하세요 2003-06-11 16:06:43
"남편도 전쟁터에서 죽었지만 내 사는 것도 전쟁이었지"

하는 말이 인상적이네요.

할머니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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