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가는 부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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잃어가는 부엌의 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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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년 중 가장 기다려지는 날이 추석과 설날이다.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올라 오시기도 하는 날이지만 워낙 손주들을 사랑하는 분들이라 아이들이 더 기다리기 때문이다.

이것저것 챙겨 넣어 당신들의 키보다 더 큰 보따리를 안고 개찰구를 빠져 나오는 모습이 안스러워 그러지 말라고 해도 해마다 가슴에 안은 보따리는 더 커지고 있다.

아이들의 선물을 잊지 않으시기에 더 기디려지기까지 하는지도 모를 일이지만 아이들은 며칠 전부터 성화다. 이렇게 만나게 되면 제일 먼저 어른들에게 큰절을 올린다.

그동안 건강하게 잘 지내셨는지 또 앞으로도 건강하게 지내시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두 명절 때와 생신 때는 큰절을 올리는 것이다. 물론 전화로도 안부를 여쭙기도 하지만 예의를 갖추어 보는 것도 좋은 일인 듯싶어 아이들과 함께 하는 것이다.

이때 가장 예쁘고 단정하게 절을 하는 사람은 딸아이 이다. 엄마인 난 어쩐지 쑥쓰러워 싱겁게 끝내고 마는데 얼마나 예쁘게 하는지 이번에도 다 함께 절을 하는데 딸아이만 속 빠지더니 혼자서 나비같이 앉아서 사뿐이 절을 하고 일어서는것이 아닌가. 그 모습이 너무 이쁘기도 하고 여우같기도 해서 웃고 말았지만 할머니와 할아버진 연신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절을 받고 나면 아이들에게 줄 선물 보따리를 푸신다. 선물이래야 셔츠와 양말 정도이지만 아이들에게는 이보다 더 큰 선물이 없다. 며느리에게 줄 선물도 옷가지 사이에 끼워 오는데 참기름 ,콩가루, 깻가루, 미역, 멸치 등이다. 이때 가장 행복해 보이신다.

며느리와 손주들에게 줄 생각으로 이 물건들을 고르고 다녔을때 얼마나 즐거워셨을까를 생각하면 나도 이다음에 내 손주들에게 예쁜 선물을 할 수 있도록 해야겠지 생각을 하게 된다. 아이들은 선물을 들고 이방저방 뛰어다니며 즐거워하고 형님과 난 부엌에서 다과상을 마련하며 각자 상상에 빠지기도 한다.

형편이 어려워도 아이들의 추석빔은 잊지 않았던 시간속으로 달음박질 치는 것이다. 어느새 단발머리 소녀가 되어 군청색 운동화를 들고 몇날며칠을 그렇게 끌어안고 지내는 나의 모습이 보이기도 하고 운동화가 닳을세라 고무줄놀이를 할 때도 벗어 놓고 하다가 오히려 더 더럽혔던 것에 속상해서 먼지를 털고 닦다가 해질녘에 들어가는 뒷모습이 보이기도 하는 것이다.

사고 싶으면 언제던지 살 수 있는 지금과는 달리 양말이 구멍이 나도 기워신었던 그때라 이때를 기다린 것처럼 묵혀 두었다가 꺼내 놓는 보물단지마냥 양말이며 운동화는 최대의 선물이며 최고의 날이기도 했던 것이다.

그러다 꽃무늬 바지가 너무 이뻐서, 운동화가 너무 신고 싶어서 고무신을 찢어 버렸던 기억에 피식 웃음이 나기도 했다.

그래서 아이들에게 추석빔으로 양말이라도 사주어야겠다는 생각으로 며칠 전부터 백화점으로 가 보기도 했던 것인데 경제 불황으로 한산해진 백화점 안은 점원들만 덩그러이 남아 있어 명절 분위기가 나지 않았다. 세일품목엔 발 디딜 틈이 없을 만큼 붐볐던 예전과는 다른 분위기였다.

그나마 식료품 매장과 음식코너는 사람들의 발길이 끊이지 않았다. 고소한 기름 냄새가 흐르고 선물세트가 즐비한 코너 앞엔 이것저것 재보는 듯한 표정이 역력했다. 전 부치는 코너엔 아줌마들이 줄을 잇고 있는 풍경도 예전과는 다른 모습이었다. 제사상에 올릴 전을 사 가기 위함이었다.

며칠 전부터 시장을 보아 갖가지 나물을 준비하고, 다듬어 부치고 묻히고 하던 엄마들의 모습이 이젠 백화점안에서 해결되고 있는 것이다. 송편까지도 만들어져 나오고 있으니 편리하고 빠른 세상이라 아니 할 수 없었지만 친척들이 모여서 송편을 빚고 전을 부치며 웃음 소리가 떠나질 않았던 부엌의 소리를 점차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싶기도 했다.

나 또한 며느리 입장이라 가끔은 힘들고 어렵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지만 그래도 이때만큼은 식구들이 다 모여 정을 나누는 자리인지라 그다지 싫다는 생각은 해보지 않았다. 어쩜 종가집 며느리가 되어 보지 않아서 속 편한 소리한다고 할지는 몰라도 재료만 준비해 놓으면 동서들이 다 모여서 음식을 장만하다 보니 힘들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남자들도 송편을 빚고 밤을 치고 잔심부름까지 다 하다 보니 오히려 보기가 좋았다. 노르스름한 버섯전을 한입물고 나면 튀는 기름에 손등이 데어도 따가운 줄을 모르는 것이다.

그때 먹는 전맛은 꿀맛이다. 모양새가 흐트려진것은 우리들차지다. 제사도 지내지 않았는데 여자들이 낼름낼름 입질한다고 옛날 같았으면 경을 쳤을 일이지만 이것도 변화된 모습이라면 모습이다.

제사상에 바나나가 올라가고 파인애플이 올라가는 시대가 되었다고 하는 말이 틀린 말이 아님을 실감하는 날이 머지 않음을 느꼈다. 김치선물이 들어 왔다는 형님말에 놀라워 했지만 세태를 반영하는 선물풍속도라 할 수 있었다.

또 김치 선물이 가장 반가웠다는 형님말에 모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기발한 생각을 했다는 것에 높은 점수를 매기기도 했다. 탕국에 들어가는 무를 토란처럼 만들어 넣었다고 야단을 맞기도 했지만 "시원하게 잘만 끊여졌는데 뭐 맛만 좋다 그렇지 않어 동서." 하는 바람에 또 손뼉을 치며 웃기도 했다.

1차는 이렇게 차례를 마치고 2차 행사지인 다른 형님집으로 향하고 나면 여자들은 느긋하게 설거지까지 마치고 커피로 피로를 풀고 나면 11시가 된다. 남은 음식을 사들고 돌아오는 걸음이 가볍다. 눈꺼풀은 내려 앉지만 어렸을적 내가 받았던 선물을 다시 나의 아이들에게 나와 맺은 모든 사람들에게 돌려 주고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되는 것이다.

가슴설레던 그런 떨림은 덜하지만 나의 아이들에게 그런 명절을 기억하게 해주고 싶기에 양말 한컬레라도 사서 예쁘게 포장하여 조카에게도 이모에게도 아주버님에게도 지금껏 하나 하나 나눠 주곤 했다. 그건 내 스스로의 즐거움이기도 하고 소중한 추억을 잃고 싶지 않는 나의 욕심이기도 하다.

그리고 일가 친척들이 모이고 음식을 장만하는 모습에서 어머니들이 살아온 풍습을 알게 되고 거기서 느끼는 정과 며느리들의 아픔이 보이지만 점점 변화하는 명절풍속이 편리함을 추구하고 핵가족을 요구하다 보니 부엌에서 들려 오는 희노애락의 소리를 잃어가고 있는 것은 아닐까 생각이 들기도 했다.

그것은 즐거움이기도 했고 고통이기도 했지만 여자들만이 누릴수 있는 최대의 행복한 공간이기도 하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될것 같아서다. 또 내어릴적에도 내 어머니가 어렸을적에도 있었을 명절때의 아름다운 일들을 잃지 않기 위해서라도 흉내라도 내고 싶은 것이 나의 마음이기도 하다. 이것도 사치스런 마음에서 우러 나온 것이라고 할수도 있지만 결코 변화만이 좋은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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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철 2003-09-15 16:50:31
아름다운 글 잘 읽었습니다. 제목부터 너무 근사합니다. 이상희 기자님이 어떤 분이신지 궁금합니다. 잃아가는 부엌의 소리를 생각할 줄 아는 분이시니 참 아름다운 분이실 것 같습니다.
저는 박철의 세상이야기를 쓰는 사람입니다.
라는 홈을 운영하고 있습니다.
비슷한 생각을 갖고 있는 분들이 찾아오는 곳입니다.
이상희님이 오셔서 오늘 글 뿐만아니라 종종 글을 올려주시면 무한 영광이겠습니다.

http://solwslow.org

박철드림.

바보 2003-09-15 21:33:50
부엌의 풍경 너무 잘 표현하셨네요. 반가워요. 자주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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