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 완장이 난무하던 5,60년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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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완장이 난무하던 5,60년대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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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방부, 46년간 통제하던 군납제도 등 폐지

^^^▲ 도끼만행 때 미류나무
ⓒ 한국사진기자단 ^^^
지난 9일에 국방부는 군납안전제도 폐지와 민통선 출입절차를 간소화한다고 발표했다. 그 이유는 부정부패를 막는다고 보기도 하지만 필요 없는 제도여서 없앤다고 한다. 군납을 할 때마다 생기는 비리 잡음을 아예 차단하겠다는 의도로 보인다.

1957년부터 46년 간이나 시행해온 이 제도는 군수품 불량납품으로 인해서 전쟁이나 군사작전 피해를 줄이기 위한 목적으로 만들어진 제도다. 하지만 이번에 간소화조치를 내란 것은 생산업체를 선정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확인이 이루어진 것을 다시 확인하는 일이어서 없앤다고 한다.

따라서 누구든지 관계법령이 정한 일정한 요건만 갖추면 자유경쟁 원칙에 따라 군납에 참여할 수 있게 되었다. 또 다른 조치로 민간들이 출입통제가 제한되고 있는 북방지역에 있는 취락지역을 출입할 때마다 받아야 했던 신원조회를 생략키로 했다고 한다.

비무장지대는 국제 협약에 의해서 무장이 금지된 지역으로 군대의 주둔이나 무기의 배치 등 군사시설의 설치가 금지되는 지역으로 민간인의 출입이 금지된 지역이다. 우리나라는 1953년 7월에 '한국군사정전에 관한 협정'이 체결되어서 군사분계선이 확정되어서 38선을 경계로 각각 2km씩 비무장지대가 설정되어 있다.

또한 '민간인의 비무장지대 출입에 관한 협의'에 의거 비무장지대에 한국 거주주민의 '자유의 마을'이 생겼고 북쪽에는 '평화의 마을'이 생겼다. 이 지역을 출입 할 때는 군사정전 위원회의 허가가 있어야 한다. 양측 경비병들은 이 군사분계선 지역을 자유로이 드나들었는데 76년도 '도끼 만행사건'이 발생되어서 부분적으로 출입이 금지되었다.

도끼만행 사건은 76년 8월18일에 판문점 공동경비 구역 안에서 초소시야를 가리던 미류나무 절단 작업을 하던 중에, 갑자기 북한 경비병 30여명이 도끼와 곡괭이를 휘둘러서 미군장교 2명이 사망하고, 카츄사 등 9명이 중경상을 입은 사건이다.

이 사건으로 미국방성은 2개 전투 비행대대를 한국에 급파하였고, 북한은 예비군을 포함하는 전군 전투태세에 들어가는 명령을 내려서 긴장이 고조되었었다. 하지만 협상 끝에 판문점 공동경비구역을 남과 북으로 가르는 '분할 경비안'에 합의하여서 사건을 일단락 지었다.

이 사건으로 쌍방의 경비병이 자유로이 드나들었던 군사분계선을 분할경비 안에 합의하여서 상대지역을 출입하지 못하게 되었다. 그 후에 통제가 더 엄격해 지고, 이 지역에 안에 있는 자유의 마을인 '대성동'은 통제지역으로서 입.출입시에 더 불편함을 받게 되었다.

대성동 지역 주민들은 전쟁 직전까지 50여 세대에 200여명이 농업에 종사하고 살았는데 미처 피난을 떠나지 못해서 그곳에 눌러 산 주민들이다. 이곳에서 농사를 짓고 사는 주민들은 대개 1인당 3만여 평의 평균농토를 가지고 있고, 영농기술이 기계화되어서 상당히 여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다.

하지만 입출입시, 자녀교육, 혼인문제 등 다소 불편점이 있는 지역이다. 친척이 방문하는 것도 허가를 받아야 하고 해서 다소 부자유스러웠는데 그것을 이번에 간소화한다고 한다. 들고나는 일이 생기면 일일이 신고를 하였고, 출입 때마다 신원조회를 했었다.

5,60년대는 완장이 난무하던 시대

50년대 전쟁 이후에 우리에게 두드러진 현상은 금지와 통제였다. 그 대표적인 것으로 보다 강화된 소위 통행금지라는 것으로 자정에 무조건 집으로 돌아가야 하는 것과 군사보호목적이 있는 지역의 출입제한이다. 그리고 사회적 불안으로 인한 관공서나 공공장소의 출입에 많은 제약을 받았던 점이다.

그러한 제약 때문에 그 당시에는 수많은 완장형태의 것들인 '증'이라는 것이 있었다. 1954년 5월 23일자 J신문의 내용을 보면, 이러한 증명서가 대개 상이군인, 특수군인, 일반경찰, 공무원, 일반인으로 구분해서 많은 것들이 있었다. 특정 신분이라는 것을 내세워서 공짜로 무엇을 얻겠다는 것이 팽배했던 현상에 기인한다.

그런 종류들을 살펴보면 임검증, 출입증, 취재증, 단속증, 통감증 같은 증이 있었다. 이러한 것을 가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일반인들보다는 특정 지역의 출입이나 무료이용에 유리하게 작용했다. 그래서 제한 지역이나 대성동에 가려면 이들에게 부탁을 하기도 하고 같이 동행을 해서 신분을 확인하게 하는데 도움을 받기도 했다.

그런 폐단은 군사지역을 방문하는데 그치지 않고 여러 곳에 부작용을 낳았다. 공짜와 우선권이라는 것에 사용하는 것이 대표적인 것이고, 그것 하나쯤 같고 있지 않으면 행세를 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빌려 사용하기도 하고 아무개 아들딸이라고 하면서 극장 같은 곳을 무단으로 들어가기도 했다.

지금은 말도 안되지만 그 당시에는 그것이 통했다. 특히 낚시를 즐기는 사람들이 군사분계선지역에 고기가 잘 잡혀서 어떤 수단을 쓰든지 그곳에 가보려고 했다. 그래서 증을 빌려서, 갔다 오면 은근히 자랑하던 때도 있었다. 그러다 보니 그 지역의 통제는 점점 강화되었다.

대성동은 그러한 폐단에 피해를 보게 되어서 점점 힘든 지역이 되었다. 좀처럼 가기가 어려운 지역으로 변해서 대성동 하면 무조건 자유제약이 많은 지역으로 오해를 받게 되었고, 지금도 나이가 먹은 세대들은 아주 불편한 지역으로 알고 있고, 특수 계층의 사람들이 증명서를 가지고 낚시나 하러 가는 곳으로 알고 있다.

다녀온 사람들의 허풍도 대단했다. 무슨 장군 말을 하니까 무조건 통과라는 말과 고기 반, 물 반이라는 말로 늘 힘없는 사람들에게 동경하는 장소로 만들었다. 또한 통금과 관련한 것도 무슨 증이 있으면 아주 유효하게 써먹었다. 술을 먹다가 좀 늦으면 차편을 부탁하기도 하고 아예 파출소에서 신세를 지기도 했다.

아니면 손목에 무슨 증표를 써달라고 해서 위기가 생기면 그것을 보여주면 통과가 되는 일도 생겼다. 그래서 지금처럼 사람들이 빽 없으면 못산다고 생각한 것이 아니라, 증이 없으면 못산다고 하는 말이 나올 정도로 증이 많이 사용되었던 시기다.

미스 김, 레지, 마담이라는 말 유행

전쟁시대에 살았던 6080 세대들은 학생시절에 물들인 군복을 입고 워커를 신었으며 머리는 장발이었다. 집에는 백색 전화가 있어야 부자 행세를 했다. 미스 김이라는 말이 유행해서 이름도 모르는 젊은 여자를 보면 무조건 미스 김이라고 불렀다. 그것은 여성을 총칭하는 말로 사용해서다.

다방에서 일하는 여성을 미스 김이라고 부르고 결혼을 했을 법한 여성에게는 마담이라는 말을 높임말처럼 썼다. 원래 미스라는 말을 잘못 생각해서 지식층에 해당하는 여성을 부르는 것으로 인식해서이고, 아줌마를 다소 높여서 붙이는 말로 사용해서였다.

당시의 신식 여성은 오도리 햅번 스타일의 머리를 하고, 맘보바지에 하이힐을 신어야 했으며, 발키코트, 색드레스와 페티코트 같은 것을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멋쟁이였으며, 행세를 하는 여성으로 치부되었다. 도시 중심에는 다방도 우후죽순처럼 생겨서 많은 여성들에게 일자리를 제공했다.

인기가 있는 여성들이 '가오 마담'이라는 말을 붙여서 선금을 받고 이곳저곳으로 옮겨 다니기도 했었다. 유행가를 퍼트리는 일차적인 일은 극장에서 했지만, 다방의 축음기 소리가 대중들에게 유행을 시켰다. 노래도 맘보, 차차차, 부기우기, 같은 노래가 유행했고, 유기장이나 들녘에서도 그런 노래와 맘보춤이 유행했었다.

또한 영어 몇 마디를 하는 것이 유행이어서 미국인들을 보면 무슨 말이든지 하려고 해서 별 우수꽝스러운 말들이 사용되기도 했다. 구두닦이를 '캄온, 슈샨보이' 하고 불렀고, 레지, 마담, 가오 마담이라는 말을 즐겨 썼다. 다방을 커피집, 삶은 계란을 '에그반숙'이라고 했고, 설탕을 '슈거가져오라'고 하는 등 수없이 많은 변형어가 생겨났었다.

우리말보다는 외래 말과 외래문화를 더 즐기고 쓰는 것이 무슨 자랑으로 알고 그렇게 했었다. '자유부인'이 신문에 게재되어서 모방심리가 작용하기도 했다. 모든 것을 자유스럽게 행동하는 여인의 표상처럼 생각해서 스스럼없이 나는 자유부인이라는 말을 농담으로 했고, 그것을 모방하려는 심리가 생겨나기도 했다.

극장에서는 전쟁영화나 반공영화를 많이 상영했다. 주인공들이 대개 용감한 군인이나 상이용사를 다룬 것으로서 영웅심을 일깨우기도 했으나 전쟁의 처참함을 보여 주는 것이 많았다. 밝은 면의 영화보다는 어두운 면의 영화로 양색시를 다룬 영화나 전쟁고아가 성장해나가는 과정 같은 것이 많았다.

전쟁으로 억제되었던 욕구를 분출하려는 것이 사회 곳곳에서 일어나면서 사회의 문란 속도가 빠르게 진행되었다. 그러한 것을 막아주는 것에 일익을 담당한 것이 심야 통행제한이다. 술을 먹다가도 서둘러서 집에 가게 만들었고, 절전과 자원의 낭비를 줄이는 효과가 있었다.

그런 사회풍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통제 수단으로 썼던 여러 가지 제약사항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는 것들이다. 군납이나 군사지역의 출입통제 제한 조치도 그러한 측면의 일부다. 이 번 조치로 대성동 마을 사람들이 좀더 자유롭게 살아가는데 기여했으면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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