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욱이 IMF 사태이후 국민적 희생의 바탕위에 국가적 차원의 일종의 ‘강제저축’에 의해 형성된, 재벌이란 이름의 국민자본이 하루아침에 헐값으로 팔려가는 것을 보면서 속이 녹았다. 하루에 하나씩 커다란 기업이 넘어갈 때마다, 국민들의 땀과 피가 증발해 가는 것으로 생각되었기 때문이다.
현대란 재벌에 대해서도 별다르게 좋은 감정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최근 정몽헌 회장의 죽음을 보는 심정은 편치가 않다. 그의 죽음은 물론 기업인으로서 실패한 때문이다.
사업의 전망이 불투명한 곳에 막대한 자금을 투자했으나 투자한 자본을 고스란히 잠식당했다. 특히 상당한 자금을 불법적인 방법으로 조성하고 북한에 제공한 것이 폭로된 것이 자살의 직접적 원인일 것이다. 결국 그는 실패한 기업인일 뿐이다. 그 역시 국민들의 노고로 형성된 국민자본을 날린 주역의 한 사람인 것이다.
그러나 그가 죽음에 이르는 과정을 다시 한번 반추해보면 찹착한 심정을 느낄 수가 있다. 우선 그의 죽음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대복 비밀송금에 관한 단서가, 2001년 미 의회조사국(CRS) 래리 닉쉬 연구원의 한반도 관련 보고서이기 때문이다.
정몽헌 회장의 아버지 정주영의 고향이 북한지역이라, 노년에 북한에 대한 정서적인 끌림 때문에 대북사업에 더욱 나선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산전수전 다 겪은 노련한 기업가가, 현대그룹의 운명을 걸만한 사업을 성공에 대한 가능성 없이 무모하게 도전했다고 생각하기는 어렵다.
그는 무언가 정부와 북한당국으로부터 내밀한 언질을 받고, 그 성공가능성에 대한 나름대로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을 것이다. 정부의 특혜에 의해 성장해온 노련한 기업인이 아니었던가! 그러나 그의 예상과는 달리 상황은 북한과의 관계개선이 쉽게 이루어지지 못했던 것이 북한관련 사업이 차질을 빚을 주 원인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그 차질의 원인은 현대그룹 내부나 우리정부, 그리고 북한이 아닌 외부에서 찾아야 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당연한 논리적 귀결이다. 한때 햇볕정책이 급진전되어 금세라도 북한과의 긴장관계가 해소되고, 북한과 일본과의 관계개선도 눈앞에 다가온 듯 했었다. 북한도 경제특구를 정하고 개혁정책을 실시하는 등 급진전 될듯하던 상황이 갑자기 냉각된 것이다.
그리고 현대그룹의 대북사업도 그에 따라 비틀거리기 시작했다. 결정타는 작년부터 시작된 북핵 위기와 관련된 것이었다. 처음에는 비교적 의연하게 대처하던 우리정부도, 정권교체기에 불거진 이라크전쟁에서 보여준 미국정부의 강경한 태도를 보고 위축되기 시작했다.
노대통령은 국민들의 엄청난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라크 파병선언을 하기까지 하면서, 북핵 위기를 피해가려는 노력을 했다. 그러나 결국은 작년까지 지속되어 오던 금강산 관광사업에 대한 정부보조금의 지급을 중단하지 않을 수 없는 상황에 이르게 되었고, 정치적으로는 대북 비밀 송금에 관한 특검 수사를 지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결국 정몽헌 회장을 죽음으로 까지 몰고 간 일련의 사태는 당초 대북사업을 시작할 당시의 정세와는 사뭇 달라진 외부조건 때문일 가능성이 많고, 그 외부조건은 우리나라 내부보다는 국제적 환경의 변화에 의한 요인이 더 크다는 것이 나를 씁쓸하게 하는 이유이다.
실패한 기업인이 목숨을 끊는 것으로 자신의 실패를 덮으려 한다는 것은 오히려 무책임 할 수도 있다. 최후의 순간까지 실패한 기업이 사회에 미치는 영향을 최소화해야 하는 의무가 있는 것이 기업인의 자세이다. 그러나 그의 죽음이 심정적으로 안타까운 것은 최근 우리사회에 드리우고 있는 암울한 분위기에 대한 상징처럼 느껴지기 때문이다.
광복절이 다가오고 있다. 일본의 지긋지긋한 압제로부터 해방된 후 근 60년. 지금 우리사회의 주소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그리고 아직도 해결되지 않고 있는 민족의 통일과, 자주적인 국가건설은 언제나 가능한 것일까. 경제적 곤란으로 인한 자살의 행진이 잇따라 발생하는 시기에 우리는 빈곤대책보다 국방비 증액을 결정하고 있다.
그래서 한 실패한 재벌 총수의 죽음을 바라보는 시선이 이렇게도 씁쓸한 것인지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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