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어떤 교수는 2025년 한국은 ‘후기 파시즘 시대’(post-Fascism Age)라 부르며, 어렵게 이룩해온 한국 민주주의 촛불을 끄려는 세력들이 헌법과 법률을 무시하며, 장기 통치를 노리고 탐욕적 권력을 쥐고 끼리끼리 ‘권력 놀음’ 호의호식(好衣好食)에 빠진 자들이 정신 멀쩡한 사람들을 범죄자라 하며, 테러리스트라 낙인찍으며, 자기들은 무결점이라 주장한다.
로버트 제이 리프톤(Robert Jay Lifton)은 파시즘의 시대는 ‘죽음으로 포화된 시대’(Death-Saturated Age)로 규정한다. 정신 똑바른 국민을 기만하고, 쥐도 새도 모르게 사라져 버린 이웃, 엘리트 우월주의에 빠진 정신 나간 지도층들의 보통 시민권에 대한 적대감의 표출 등 최소한 정치 사회적으로 “죽음이 어른거리는 시대”라 할 수 있다.
사실 사람들에게 죽음은 끔찍한 일이 아닐 수 없다. 특히 파시스트 정치 지도자의 국가 폭력에 의한 무고한 죽음은 끔찍한 일이다.
1980년대 콘트라 전쟁 당시 남미에서 나돈 이야기 중의 하나는 “무릎을 꿇고 사는 것보다는 서 있는 채로 죽는 것을 택할 것”(mejor morir de pie que vivir en rodillas)이라는 저항정신이 있듯이 이탈리아의 파시스트당 당수였던 베니토 무솔리니(Benito Mussolini), 1930년대 합법적으로 독일 총리는 지낸 아돌프 히틀러(Adolf Hitler)와 같은 폭력주의자 시절에도 정신이 올바른 시민들이 그들을 극복해 왔다.
또 20세기에 멕시코 혁명가 에밀리아노 사파타(Emiliano Zapata)와 스페인 내전의 공화주의 여걸, 열정의 꽃(La Pasionaria)인 돌로레스 이바루리(Dolores Ibárruri)는 “억압이나 노예 생활보다 품위 있는 죽음을 열렬히 선호한다”는 이들의 모습을 2025년 한국 사회에서는 보기 힘들다. 절규하는 지식인은 있어도 행동하는 지식인은 드물다. 고고한 척 중립을 지킨다며 이쪽저쪽으로 얼굴을 돌리는 기회주의 지식인은 있어도, 한국판 사파타와 이바루리는 찾기 어렵다.
한국에서는 생각할 수도 없었던 2024년 12월 3일 비상계엄령이 선언되면서 한국 사회의 그동안 숨겨져 왔던 보수라는 이름의 엘리트 세력들의 민낯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그들의 지적 능력은 포장된 것과는 다르게 형편이 없었고, 그들이 추구한다는 미래는 자신들의 탐욕을 달성시키려는 끊임없는 노력에 불과했으며, 비전은 사전 속에 있는 단어에 불과하고, 국가의 정체성, 주권, 국익 등 역시 일회용 정치적 구호의 수단으로만 이용됐다. 그들은 국민 기만에 능숙했지만, 철 지난 낡은 것들이어서 금방 탄로 났다.
한국에서는 갑자기 양손에 수갑이 채워지고, 까만 차에 태워져 어디론가 사라지고, 신체는 인간의 것이 아니라 물건에 지나치지 않게 되어 수거 대상이 되는 등의 과거 권위주의, 전제주의 시절의 양태들이 21세기 한국에서 재연되려다 일단 주춤했다. 통제되지 않은 무법 상태의 국가 테러 집단 행위가 크게 벌어지려다 비상계엄령의 단명으로 일단 위기로부터 일정 거리가 확보됐다. 그러나 언제든지 그 거리는 다시 좁혀질 수 있다는 국민의 두려움과 우려가 교차된다.
이런 말이 있다. “한 사람의 죽음은 비극이지만, 수백만 명의 죽음은 통계”라는 말이 있다. 파시스트의 인식은 이러한 수준에 머물러 있다고 해도 지나치지 않는다. 무릎 꿇기를 거부하는 정치인, 언론인, 지식인, 노동자 등 자신의 명령에 따르지 않는 자들은 모조리 반(反)국가 세력이며, 어디서 만들어진 말인지 모르지만 공산 전체주의자들이라며 ‘반국가단체’로 규정하고 이들은 수거해 살해할 대상이라는 계엄령 선언에 깊숙한 관여한 것으로 이야기되고 있는 전직 군 정보장교의 끔찍한 ‘죽음의 행렬’ 기획은 인간 사회에서는 결코 있어서는 안 될 일이지만, 한국적 파시스트와 만나 멋진 신세계의 꿈을 펼치려 했다.
이들은 시민적 자유, 민주주의 제도, 권력을 책임지게 할 가능성에 대한 전면적 공격을 개시함으로써 사회는 일대 혼란으로 빠져들게 됐다.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하루 동안만 독재자가 되고 싶다”고 했다. 그의 파시즘적 이상은 독재자들을 숭배하게 만들고 있다. 동맹국이나 파트너들의 정상적 지도자들과의 교분보다는 인권 말살, 장기 집권의 신화를 쌓아가는 북한 김정은, 러시아의 푸틴 등과 브로맨스라는 말을 들을 정도로 친하게 지내려 한다.
트럼프는 또 “나라를 구하는 사람은 어떤 법도 어기지 않는다”라고 말했다. 자신이 국익을 내세우며, 정치적으로는 왕(King)으로 착각, 법 위에 선 평화주의자라는 착각에 빠져 있는 듯하다. 그의 이 같은 말은 공허한 연극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요즘 상기되는 사건들과 인물이 있다. 아르헨티나의 ‘더티 워즈’(Dirty Wars), 칠레 피노체트의 학생 탄압, 나치의 게슈타포의 인종 청소 및 일회용 정치 등이다. 폴 길로이(Paul Gilroy)는 “공포는 우리가 상상하는 것 보다 훨씬 더 가까이 있고, 재발을 막으려면 그것들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했다. 현재의 파시즘은 과거의 복제품이 아니다. ‘그때는 그때고, 지금은 지금’이라며 현재 상황에 맞추려는 변형된 파시즘이 퍼지고 있다. 국가 폭력이 그 중 하나다. 국가 전횡적인 사법 권력 역시 마찬가지이다.
모든 시대는 고유한 파시즘을 가지고 있으며, 우리는 권력의 집중이 시민들이 자신의 자유 의지에 따라 표현하고, 행동할 가능성과 수단을 거부하는 곳마다 경고신호를 볼 수 있다. 특히 친일적 사고 체계에 찌들어 있는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하라고 요구할 수 있지만, 현실적으로 그들은 변하기를 거부할 것이다.
결국 이런 지도자는 건전 사회와는 결별시켜야 한다. 시민권은 헌법적 권리가 이니라, 자신이 부여할 수 있는 것으로만 생각하는 왕(王)이라는 인식을 가진 지도자에게는 민주주의는 거추장스러운 것이다. 그에겐 장애물이다. 그래서 그 같은 지도자는 대천지수(戴天之讐)라고 할 수밖에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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