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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요즘도 전복죽을 먹으려면 목이 잠긴다.
전복죽에 얽힌 센양에서 만난 한 탈북자 이야기를 할까 한다.
작년 겨울, 내몽고를 다녀와 센양에 도착한 날 나는 우연히 한 탈북자를 만나게 된다. 이-메일 확인을 위해 피씨방에 들어가는 길 1층 편의점에서였다. 1월 중순 영하 19도의 강추위에 얇은 홑옷을 입었고 가슴이 드러난 속에는 내복만 달랑 입은 40대 초반의 그는 편의점 복무원에게 한국영사관 전화번호를 묻고 있었다.
무성의한 조선족 복무원이 귀찮아하는 틈에 나는 그가 한 '한국령사관'이라는 특유의 발음에서 북한사람임을 의심했다. 조선족이었다면 조선족끼리 중국어를 쓰는 게 편한 터이고 영사관 전화번호야 길에서 물을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는 생각에서였다.
혹시나 생각하면서 일행과 함께 엘리베이터를 타고 4층으로 향하고 있는 내내 마음이 찜찜했었다. 그런데 아니, 이게 웬 일인가. 한참 피씨를 두드리고 있는데 '이거이 무에 하는 거입네까?'라는 말이 뒤통수에서 들려왔다. 그였다.
나는 대답하지 않고 검색창에 '심양영사관'을 입력하였다. 냅킨에 적어 번호를 건넸다. 반갑게 받아든 그는 자리를 뜨지 않고 계속 모니터를 응시했다. 몇 가지 생각을 했다. '돈이라도 좀 드릴까?', '국경을 넘어왔으니 칼 한 자루 쯤은 품에 없을까?'
설마 나에게 칼을 들이댈 리 있겠는가? 적어도 내가 아는 북한 사람이라면. 자리를 일어서 조용히 소매를 끌고 화장실 쪽으로 갔다. 서로 긴 대화는 필요치 않다. "식사는 하셨습니까?" "사흘 걸렀습네다." "일단 가시죠."
칸막이가 된 식당 중 적당히 번잡한 곳을 찾았다. 메뉴선택도 필요없었다. 빨리 된다는 오무라이스를 시켰고, 침묵이 잠시 흘렀다. 내가 대화를 주도하지 않으면 안 되는 상황이 아닌가, 그래서 잠시 생각을 정리했다. 몇 가지 물어본 후 대화를 시작했고 여러가지 얘기를 해 주었다. 그 대화는 심양영사관을 무단 침투하는 일종의 작전 같은 것이었다.
그 다음 나를 기막히게 한 것은 그가 한 몇 마디 말들이었다. 그는 궁금한 게 많았다. "중국이 이렇게 발전한 게 언제부터냐?", "남조선 경제는 아무래도 중국만은 못하지 않겠는가?", "남조선에서는 탈북자를 처벌하거나 압박하지는 않느냐?", "미국이라는 나라에 대하여" 등등. 대화로 풀려면 끝이 없었다.
기다리던 오무라이스 앞에 전복죽이 나왔다. 뭐든 상관은 없었다. 그러나 순간 나는 당황했다. 하필 왜 전복죽이람. 저 뜨거운 걸 어쩌지. 뜨거우니 천천히 드시라는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그의 손은 순식간에 그릇을 비우고 샐러드, 튀김을 지나 깍두기김치로 옮겨가고 있었다. 남은 것은 내 앞의 전복죽이었고 나는 계속해서 죽을 젓고 있던 참이다. 그의 식사가 끝날 때까지 나의 전복죽은 조금도 식지 않았다. 나는 더 저었다. 먹을 만은 했지만 말을 건네며 한동안 더 저었다. 채할 것 같았다.
내가 밀어준 전복죽을 그는 사양했다. 체면치레가 아니라 완강한 거부였다. 하지만 실랑이 끝에 그는 다시 먹게 되었다. 몇 마디 얘기를 더 나눌 때 오무라이스가 나왔다. 식사의 속도는 전혀 다름이 없다. 나는 그가 식사를 하는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는다.
우선 말을 시키면 그가 채할 것 같고, 나도 이미 눈쪽과 목이 무언가 표현할 수 없는 감정으로 잔뜩 채해 있었기 때문이다. 그 감정은 단지 그 사나이에 대한 연민이나 당시 장면에 대한 즉물적인 것만이 아니었고, 매우 복합적이었다.
급기야 다음 약속시간 때문에 더이상 지체할 수 없었다. 그의 속주머니에는 단동에서 만난 한국 관광객이 준 30위엔(약 4천원)의 돈이 전부였다. 나는 약간의 인민폐를 그에게 전해 주었다. 그리고 내몽고에 갔을 때 민속공연단이 준 행운의 목도리라는 가다를 그에게 건넸다. 이젠 정말 그 자리를 떠야 했고, 마지막으로 식당 문 닫는 시간까지 어떤 일이 있어도 여기서 나가지 말라고 당부했다.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그 뿐이었다는 것은, 그가 내일 아침 목숨을 걸고라도 결행하겠다는 심양영사관 침입계획에 대하여 나는 아무 것도 해 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어를 못 하니 택시를 잡고 '한국영사관'이란 쪽지를 보여주라 일러주고, 침입이 어려워 보이면 전화를 하라며 단지 영사관의 건물구조와 침입방법을 알려주는 것밖에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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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사관의 업무적 시스템과 스타일을 익히 경험한 나로서는 기껏 아침 8시 직후에 전화를 걸어 김 모씨의 칩입사실을 확인하는 것만이 최선이라는 것을 알고, 그 일만은 어김없이 결행했던 것이다.
조선족 말을 사용하는 영사관 직원의 일답은 "선생님, 우리는 탈북자를 안내하는 기관이 아닙니다."였다. "저도 잘 압니다만", "혹시 그런 분이" 이렇게 두서없이 탐문을 하던 나는 대뜸 그 직원의 "혹시라도 경비망을 뚫고 들어오는 탈북자는 인도하지만, 우리는 그런 경우를 거의 보지 못한다."는 말 끝에 이상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철통같이 지키니 어지간해서는어려울 것이라는 자신감의 발로였다.
그 대목에서 이성을 잃어버린 나는 지금 기억할 수도 없는 막말을 했던 것이다. 쌍욕이었다. 영사관이 왜 다른 국가 청사와 달리 빌딩건물에 입주해 있고 엘리베이터를 통해서만 진입하게 되어 있으며, 건물입구와 층별 엘리베이터 앞에서 무장경찰이 2중으로 신분증 검사를 하는 지를 알게 되자 "차라리 철조망 친 담장이라도 넘게 해 주지."라는 생각에 분노가 치밀어 오른 것이었다.
목숨 걸고 하려는 사람에게조차 기회를 주지 않는 것은 참으로 비인도적인 일 아닌가?
센양에서 강도의 칼에 찔려 병원에서 사경을 해메는 친구에게 도움을 주고자 급히 서울에서 비행기로 날아가 단박에 찾았던 영사관에서 담당자를 만날 수 없어 1시간을 기다리던 당시의 화가 이 때 엎쳐 왔던 것이다.
당황한 그 직원은 다시 침착해진 후 나에게 따져 물었다. 나의 언사가 너무 지나치다는 것이었다. 나는 사과 끝에 한국인들의 일반적인 정서에 반하는 외교업무라는 것은 온당치 못하다는 말로 욕설의 속뜻을 풀이해 주었다. 그러니 그도 이해를 했다. 혹시라도 그런 사람이 전화가 오면 미국영사관 담을 넘으라는 권유를 잊지 말라고 당부하면서 그와의 통화는 끝났다.
그해 겨울이 끝날 때까지 김 씨 생각은 집요하게도 나를 붙들어 놓고 있었다. 농사를 짓다가 힘들어 탈북했다는 말과 달리 부드러운 손등 피부를 가진 김 씨는 어디로 갔을까.
단지 압록강이 얼어붙어야 건널 수 있다는 생각에 가장 추운 때 국경을 넘은 그는 중국어 한 마디 못하는 형편에 그 겨울을 무사히 넘길 수 있었을까. 서탑 거리에 돌아다니는데 너무나 추워서 북조선 식당이 있길래 반가워 들어가려 하니 복무원이 막아서서 못 들어갔다는 그는 추위와 기아에 이성을 잃고 결국은 거기로 다시 들어가지나 않았을까.
나의 생각은 끝없이 이어졌지만 아직도 영원히 풀 수 없는 의문은 이것이다.
무엇이 이토록 우리를 철저히 소통되지 않도록 하는가. 여전히 이념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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