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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625당시 어린소년이 배고픔이 힘겨운 듯 앉아 있다.^^^ | ||
따발총과 탱크를 앞세우고 다부동 고개까지 내려갔던 인민군들에게 태평양을 건너 온 코 큰 병사들도 수없이 쓸어 지고 동촌 비행장 바닥엔 온통 검은 흑인병사 시체들로 뒤 덮였다. 그러나 그들은 끝내 경상도 젊은 혈기들이 사수하는 다부동 고개를 넘지 못했다. 처절하게 마지노선을 지키던 국군은 결국 다부동 계곡에 집결했던 인민군 탱크 부대를 북으로 기수를 돌리도록 승전했고 그 전투에서 죽은 인민군 시체들이 산 중턱 여기저기 묵은 빨래처럼 널려져 있었다.
한바탕 폭우가 내리자 인민군 병사들의 시체가 떠 내려와 작은 국도 다리를 가득히 막아버리는 바람에 개울물이 잘 빠지지 아니하고 피물이 일주일 째 논바닥에 흥건했다. 국군들이 단숨에 의성을 지나 안동 낙동강까지 밀고 올라 왔고 드르륵 드르륵 국군 선발대에게 저항하는 인민군 따발총 총 소리가 작평 마을까지 들렸던 것이다. 낙동강 쪽에서 총소리가 요란하자 이 노인은 아무래도 명 밭에 일을 내 보낸 아들과 며느리가 걱정이 되었다.
전쟁이 발발하자 행여 후손이 끓어질세라 서둘러 약혼식도 치루지 아니하고 그냥 장날 국밥 집에서 탁주 한사발로 양가 어르신들에게 면전인사를 드리고 무너미 골 살구꽃 같은 19살 강 목수 딸을 데리고 와서 첫날부터 18살 손자와 합방을 치르게 한 것이 이제 겨우 딱 보름이 지났다.
그런 아들과 며느리를 걱정하면서 이 노인이 마-악 방앗골 밭으로 나가려는데 지친 기색으로 퇴각하는 인민군들이 우르르 몰려와 이 노인네 마당에 짐을 풀었다. 이 노인네는 예천으로 가는 국도 변이고 마을에서 제일 큰 가마솥이 있었다.
“ 영감동무 가마 솥 쫌 빌립시다!”
이미 지난 번 한차례 남으로 퇴각하는 국군들이 송아지 한 마리를 삶아 먹고 간 후 가마솥에 눌러 붙은 것을 동네 아이들 대 여섯 명이 머리를 처박고 서로 먹으려고 싸운 적도 있고 뒤 따라 온 인민군들도 이 노인네 큰 가마솥에 죽을 끓여 먹은 적이 있다. 낙동 전선에서 퇴각하는 일개 인민군 소대 병력이 큰 가마솥에 보리밥을 짓는 도중에 갑자기 무슨 일인지 “동무들 오 분 이내로 빨랑 철수하라우!”
인민군 소좌가 다급하게 소리치고 인민군 졸병들은 미처 덜 익은 보리 밥을 먹지도 못하고 우물에서 물만 벌컥벌컥 마시고는 서둘러 북쪽 방향 너부렁재 고개로 도망을 치기 시작했다. 얼마나 다급했던지 물만 마시고 서둘러 너부렁재 쪽으로 도망친 인민군들이 탄환과 착검도 이 노인네 마당에 버리고 갔다.
행여 문제가 될세라 총알과 칼을 고방에 넣어두고 이 노인이 마-악 방앗골 손자와 손자 며느리가 일하는 명 밭으로 발길을 옮기는데 저 만치 마을 앞개울 섶으로 국군 선발대가 낮은 자세로 마을 쪽으로 올라오고 있었다. 그때 개울 반대쪽 동수나무 아래로 따발총을 맨 인민군 5섯 명이 힘없이 마을로 들어서고 있었다. 퇴각로를 잃고 뒤 처진 인민군들 같았다.
새 며느리 걱정으로 밭으로 가던 이 노인은 개울 섶 누런 보리밭에 납작 엎드리고 양측의 살벌한 대치에 숨을 죽였다. 국군 선발대가 느티나무 아래로 걸어오는 인민군들을 보고 M-1을 겨누면서 “아 이새끼들아 손들 엇!” 고함을 쳤다. 그러자 인민군들이 논 뚝 아래로 화급히 숨었고 연이어 땅땅! M-1 총소리가 들렸다. 그러나 드르륵 하는 따발총 응사 소리는 전혀 들리지 않았다. 패잔병들에겐 이미 총알이 다 떨어진 듯하였다. 연이어 따당! 하는 M-1 총소리만 고막을 울리고 논 뚝 쪽에 있던 인민군 병사 한명이 M-1 총을 맞고 앞으로 폭 고구라 졌다. 곧 이어
“아이쿠! 어-멧"
하는 고통스런 외마디 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는 결코 사람 소리가 아니고 숨이 끓어지는 짐승의 소리 같았다. 개울 반대쪽 너부렁재 고개 쪽으로 살아남은 인민군 4명이 화급히 도망치고 국군 선발대가 그들을 뛰 따라 가면서 총질을 해되었다. 갑자기 대낮에 장평 마을에 총 싸움이 일어나고 마을 사람들은 잔득 겁을 먹고 집안에 들어가서 방문을 잠그고 숨죽인 채 총소리가 끝나길 기다렸다.
한바탕 총질 소리가 끝나고 이 노인네는 서둘러 손자와 손자며느리가 일하는 명 밭에 가서는 “마을에 군인들이 왔다...잘못하면 붙잡혀 가니깐..내가 다시 올 때까지 명 밭골에 납작 엎드리고 숨어라!” 일러놓고 집으로 돌아오니 인민군이 짓다가 만 보리밥을 국군 선발대들이 퍼 먹고 있었다.
국군 선발대 중에는 군복도 없는 젊은 청년도 있었다. 학도병 같았다. 목에 걸친 수건에는 피물이 보였다. 곧 이어 일개 국군 중대병력이 작평 마을로 들어서고 여기저기 태극기를 들고 마을 사람들이 마을 회관 앞에 몰려 나와서 “국군 만세” 하고 왜 쳤다.
특히 일주일 전 역마 다리 아래서 시행 된 인민군 즉결재판에서 사살을 당했던 미자네 오빠 가족들이 좋아라 국군을 반겼고 모래 구덩이를 파고 네 명을 차례로 들어가 엎드리게 한 후에 포갠 상태에서 따발총으로 갈겨 죽였던 시신들을 다시 파내어서 마을 청년이 지게에 지고 돌아 왔는데 피물이 뚝 뚝 떨어지는 아들 시신을 보고는 온 가족들이 대성통곡을 했다.
마을에 그런 일이 일어나고 결국 명 밭에 숨어 있던 이 노인네 손자 만식이도 마을에서 사라졌다. 왜야하면 그날 마을로 들이닥친 국군 선발대 중위가 마을 청년들을 3명이나 차출했다. 강제로 한 것은 아니고 “어르신들 ....손자 조금만 빌립시다. 예천 저수령 고개까지만 짐꾼으로 사용하고 내 필히 돌려보내 주겠습니다...한번만 도와 주이소”
그래서 마을에 진환이,욱동이 청년 그리고 보름 전에 혼례도 안 치루고 합방을 치룬 이 노인네 손자 만식이도 탄환 짐을 지고 군군 선발대를 따라서 너부렁재를 넘어 북쪽으로 갔다. 북으로 국군을 따라 가는 남편 만식이를 보고 강 목수 딸 점례는 눈물을 뚝뚝 흘렸다. “우째든지 살아서 꼭 돌아오세요.” 하는 수인사를 하고 싶었지만 그저 고개만 떨어뜨리며 앞치마로 연신 눈물을 훔치던 19살 어린 점례는 결국 열 달 후에 유복자 아들을 낳았고 그리하여 작평마실 진성 이씨 후대도 가까스로 끓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금방 돌아 온다하며 국군을 따라 갔던 만식이는 영영 돌아오지 아니했다.
같이 갔던 마을 청년 욱동이만 다리에 관통상을 입고 돌아왔고 두 청년은 돌아오지 않았다. 제천전투에서 만식이는 인민군 포로가 되었다는 후문이 들렸다. 그리고 점례에게는 길고 긴 눈물의 세월이 시작되었다. 행복은 겨우 보름이였고 나머지 56년은 멍든 가슴으로 살았다. 그 날 식은 보리밥을 한 그릇을 넙죽 비우고 “점례씨 울지 마이소 ..내 .2-3일 안에 꼭 돌아 오께씨더” 하던...손이 크고 눈이 그렁그렁한 남편 만식이를 반세기를 기다리면 살았다. 해마다 유월이 오면 남편이 넘어 간 너부렁재 쪽을 잘 보이도록 북창 문을 열어놓고 혼자 꺼이꺼이 숨죽이며 울었다.
달무리가 진날도 울었고
해거름이 길어도 울었다.
홀 딱새가 우는 날도 울었고
두견이 슬피 우는 밤에도 울었다.
너부렁재 고개 마루를 먼지를 뽀오햫게 토하면서 예천-안동 간 완행버스가 넘어와도 “이녁아 이녁아 무정한 이녁아 금방 돌아온 다 카더니... 우찌 그리 안 오시요! 부디 떠 날 때처럼 싱긋 웃고 돌아오시오“ 혼자 중얼중얼 넋을 잃고 울었다.
명 밭에 아이를 업고 일 나가서도 울었고 아들이 초등학교 운동회 때 달리기 일등한 날도 울었고 중학교 들어가는 날 다른 아이들은 아버지가 자전거로 태워주는데 자신의 아들은 애비 없이 혼자 힘없이 갈 때도 울었고 통일벼 심어서 처음으로 휜 쌀밥을 한 그릇 먹어 볼 때도..
북으로 끌려간 남편 생각에 목이 메여 휜 쌀밥이 넘어 가지를 안았고 아들이 무럭무럭 자라서 읍내 고등학교에 들어가서 자치할 때 고추장이니 쌀이니 30여리 이고 들고, 아들 자치 방에 갔다가 돌아 올 때도 울었고 아버지 같이 인자하시던 시할아버지가 "야야 너는 우리 증손자 낳아 준, 천상 내 손녀 며느리다...고생했다“ 라는 말로 마지막 유언을 하고 돌아가시자, 장사 치루고 나서 삼일을 엉엉 슬피 울었고 늘 손자 돌아오기를 생시처럼 착각하고 너무렁재 고개 마루에 올라 “만식아 만식아 내 살 같은 우리 손자 만식아! 봄이 되면 꽃도 다시피고 소쩍새도 다시 오는데 너는 우째서 어에 그케 안 온노! 그리 떠나고 안 돌아오니 내 속이 새카막타! 만식아 만식아 우리 손자 만식아..올라거든 내 죽기 전에 돌아 오거래이...아이고 흑흑
추석과 설 때 마다 만식이 할머니 울음소리는 너부렁재 고개 마루에서 서럽게 서럽게 울렸고 그럴 때 마다 점례도 따라 울었다. 다시 일년 후 그리도 서럽게 손자를 기다리던 할머니가 “꽃다운 나이에 우리 집에 시집 온 우리 손녀 며느리 불쌍타! 우리 손녀 며느리 불쌍타! “ 하시면서 저세상으로 돌아가신 날도 점례는 수없이 울었다. 식음을 전패하고 삼일 낮 밤을 꺼이꺼이 울어서 목이 잠겨 말도 못했었다.
점례의 눈물은 그치지 않았다. 읍사무소에서 뒤 늦게나마 전사처리를 해주어서 매달 생활비 타 먹는 쪼가리 얻어 올 때도 울었고 아들이 고등학교를 나와서 서울로 올라 갈 때도 차비마련하려고 풍산 장에 고추푸대 이고 가면서도 울었고 안동- 청량리 밤 열차에 오르면서 아들이 “어무이요 내 걱정 마이소” 소리 지를 때도 울었고 그 날 밤 30리 걸어서 작평 산골로 돌아오면서도 내내 서글퍼서 울었다. 세월이 흐르고 울진에 간접이 내려와 tv방송에 떠들 때도 .
“혹시 남편이 나 못 잊어 간첩이라도 되어 남으로 내려오실 줄 모르겠다...”며 희망으로 울었고 나이가 들어 휜 머리가 생기고 보름간 살갑게 살았던 남편 얼굴 마져 가물가물 해지는 날도 서러워 울었고 현충일 날 정부로부터 상 받았을 때도 울었고 이북 사람들 못 먹어서 tv 뉴스에 피골이 상접한 화면을 볼 때도 ‘저런 저런...하면서 이북 어디에서 살아 있을 줄 모르는 남편을 생각하면서 울었고
코메디언 남보원씨가 평양에 가서 다 늙은 누이를 만나는 장면을 보고도 울었고 백발의 누이가 남동생 줄려고 들고 온 쌀자루를 보고도 “얼마나 못살면 ..저럴까?...우리 남편도 쌀밥이라도 한 그릇 먹어 보았을까?..하면서 울었다.
납북 어부가 중국으로 탈 출 할 때도 울었고 아들이 성장하여 짝을 이루는 날 남편이 앉아야 할 옆 자리에 친정 남동생이 대신 앉았을 때도 북으로 끌려간 남편이 불현듯 생각나서 눈물 훔쳤고 며느리가 떡 뚜꺼비 같은 손자를 낳았다는 연락을 받고도 “이녁아 이녁아 당신도 이제 손자가 있소..손자 보러 하루 속히 고향으로 너부렁재 넘어 돌아오시오”하며 울었다.
육이오 때 죽은 줄 알고 제사까지 지낸 사람이 국군포로 병사로 살아 온 날 은 내일처럼 손뼉 치면서
“보소 이녁도, 늙어도 좋으니 저 사람처럼 제발 살아서 돌아오시오” 왠 종일 그런 상상을 하다가 잠이 들었는데 그 날 밤 할머니는 다 늙은 남편이 너부렁재를 다시 못 넘어 온다면 뼈가루라가 되어서라도 고향으로 돌아 오기를 바랬다.
이녁아
이녁아
정분 쌓고 보름만에 헤어진 야속한 이녁아
56년전 "꼭 돌아 오꾸마!" 하시면서 당신이 마지막으로 넘어 간 너부렁재 고개 마루에 올해도 붉은 개복숭아 꽃이 속절없이 피는 봄이 돌아 왔습니다.얼마나 더 기다려야 돌아오실렵니까?
정치하는 사람 믿다가는 내가 죽어도 이제 영영 못 만나 뵈올 것 같습니다.
여보...
단 한번도 불러 보지도 못한 이름 여보..
이렇게 영영 이세상 이별로 살줄 알았으면 떠나시던 날 다정한 인사라도 나누었을 것을 우째그리 매정이요.
이보시요 영감
이제 나도 육신이 다하여
언제 죽을 지 모르지만
혹 내가 기다리다가 먼저 죽더라도
이녁은 꼭 돌아와 내 곁에 묻혀주시요
살아 생전 못 돌아 오신다면
죽어서 뼈라도 좋으니 꼭 돌아와 내 곁에 묻혀 주시요.
그리고 추석 날마다 내 홀로 키운 당신의 아들과당신의 손자들에게술 한잔이라도 같이 받는 것이 내 소원이요.이승에서 못다한 서름사랑저승에서도 못 한다면 내 죽어도 영영 눈을 감지 아니하겠오 내 당신을 믿습니다.이북에 가족이 있어도 내 다 용서 할 것이요56년 이녁만 기다리면서 살아 온 이몸을 쪼매라도 생각한다면 한줌의 뼈라도 좋으니 꼭 내 곁으로 돌아 오시요!
그 다음 날 혹 정말로 시집 보름 만에 사라진 남편이 살아서 돌아 올 것 같아서 이제 폭삭 늙은 점례 할머니는 너부렁재 고개 쪽으로 올라가고 있었다. 아무래도 남편이 이번만큼은 꼭 돌아 올 것 같은 환상에 젖어 너부렁재 고개를 힘겹게 오르시는데 저만 치 읍내 택시가 너부렁재를 넘어오고 있었다.
리고 택시는 허리 굽은 호호백발 할머니를 스치더니 갑자기 끼-익하고 멈추었다.
누군가? 하고 할머니가 돌아서 보는데..웬 젊은 군복을 입은 젊은 청년이 택시에서 내리면서 “할머니!” 하고 고함을 쳤다. 제일 큰 손자다. 시집 온지 보름 만에 남편 북으로 보내고, 유복자 아들 낳고, 그 아들이 다시 손자를 낳았는데 그 손자가 벌써 군대를 가고 첫 휴가를 나와서 작평 산골에 홀로 사시는 할머니를 뵐로 내려 온 것이다.
“아이고 내 새끼! 경국이라!”
얼른 눈물을 훔치시면서 달려오는 손자를 점례 할머니는 덥석 안으셨다. 반세기...남편을 기다리시며 눈물로 사신 할머니는 이제 바람처럼 가벼워지셨다. 그렇게 19살 살구꽃 같은 새댁은 호호백발이 되도록 56년 동안 남편만을 기다리면서 살았다. 그러나 해마다 육이오는 다시 오지만 남편은 단 한 번도 다시 오지 않았다. 끝.
꼬랑지
이땅에는 유복자도 많고 일편단심으로 남편을 한평생 기다리며 사신 전쟁 미망인도 많은 나라다. 내 친구 모친도 참으로 훌륭하게 자식 키우고 고고하게 살아오신 분이 있으시다.6.25....전쟁으로 어느 날 갑자기 夫婦別離로 일평생 한을 안고 살아오신 그런 분들이 이제 하나 둘 저세상으로 가시는데도 아직도 몰지각한 완장들은 자기 권력 욕심으로 ...그런 애절한 분들의 소식조차 찔끔 찔끔 생색용으로 사용하고 .... cd 한장이면 속시원하게 생사를 속시원하게 확인이 가능할 일을......禁하는 나라다. "야 이 천하에 고현 놈들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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