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적 올바름 vs 자연적 올바름
스크롤 이동 상태바
정치적 올바름 vs 자연적 올바름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 ⓒ뉴스타운

트럼프는 결국 당선되었다. 박근혜는 하야와 탄핵의 기로에 있다. 전혀 다른 두 상황에는 공통점이 있다. 첫째는, 언론이 그 뒤에 있다는 것이다. 전자는 언론의 힘에도 불구하고 대통령이 되었고, 후자는 언론이 촉발한 정치적 위기로 퇴진 압력을 받고 있다. 둘째는, 정치적 올바름(Political Correctness, 약칭 PC)과 관련되었다는 점이다.

미국 언론을 비롯해서 우리나라 언론의 예측은 틀렸다. 그들은 트럼프보다 클린턴의 승리를 예상하고 있었다. 정확하게 말하면, 희망하고 있었다. 그렇게 여론조작을 했다. 그러나 주류언론의 총애와 호위를 받은 힐러리를 트럼프는 저돌적 돌파력으로 이겼다. 그는 자신의 저서 ‘거래의 기술’에서 말했다. 사람이란 가끔 거칠게 나갈 필요가 있을 때에는 그렇게 해야 한다.

언론은 유세기간 중 나타난 트럼프 현상을 애써 무시하거나 모욕했다. 그는 미치광이에, 허언증에, 통제력이 약한, 무뢰한에 철면피로 조명되었다. 중하위층 백인 남성 노동자들이나 지지하는 사람이라고 매도당했다. 결과는 트럼프의 압도적 당선이었다. 이것은 최근 미국 주류 엘리트 사회가 추구해온 ‘정치적 올바름(PC)’이라는 위선적 가치에 대한 정직한 미국인들의 거부감과 저항이었다.

미국 언론과 주류 엘리트층은 트럼프가 승리를 거머쥐자 충격에 빠졌다. 자신들이 애써 추구해온 PC가 무너지는 순간을 체험한 것이다. 정직과 진실을 중시해온 일반 미국인들에게 PC는 비정상과 위선이었다. 동성애 및 동성결혼 합법화, 인종차별 부정한다면서 행해지는 백인에 대한 역차별, 남녀평등의 이름으로 자행되는 남성에 대한 역차별 등등. 배려와 관용이라는 미명 하에 벌어지는 허위와 거짓. 그에 대한 불만이 트럼프의 승리를 가져왔다. ‘세련된 위선’보다 ‘거친 솔직함’이 낫다는 것이다.

PC주의자들은 정치적 올바름으로 포장된 그들의 위선을 거부하거나 부정하면, 부도덕하고 관용적이지 못한 사람 혹은 꼴통으로 매도했다. 그런데 앞장을 선 것이 언론으로 대표되는 주류 엘리트들이다. 이는 우리사회에서도 유행하기 시작했다. 또한 소위 민주 혹은 진보 혹은 좌파 세력이라는 사람들이었다. 소위 패션좌파의 득세였다. 그들은 지금 적과의 내통도 ‘소통’이라고 강변할 정도로 뻔뻔하다.

전가의 보도처럼 위력을 떨쳤던 PC는 보편적 가치를 가진 미국인들의 심판을 받았다. 정치적 올바름이란 원래 약자와 소수자에 대한 배려의 의미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보편가치를 준수하는 다수에 의한 배려의 의미일 때 PC는 진정한 가치가 있다. 역으로 그것이 지배하려고 할 때, 주객전도와 본말전도가 된다. 하극상이 만연해진다. 카오스가 세상을 지배하게 된다.

그런 상황에 대한 미국의 저항이자 해법이 트럼프 현상이다. 이는 보편가치를 추구하는 ‘자연적 올바름(Natural Correctness, NC)’이라는 안티테제다. 침묵하는 다수는 자연적 올바름(NC)을 통해 PC를 통제하기 위해 트럼프를 들어올렸다. 언론은 이를 외면하거나 무시하거나 간과했다.

우리 문화 및 언론미디어계도 PC 과잉이다. 특히 한국사회에서 PC는 좌파의 이데올로기화 되었다.심지어 광화문 광장에서 김일성 만세는 외칠 수 있어도, 태극기 게양은 안된다는 식의 이상한 PC적 주장과 모순들. 그런 것들에 대한 저항 결과가 박근혜의 당선이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그런 시대정신을 읽어내지 못하고 PC주의자들에게 휘둘렸다. 트럼프처럼 ‘필요한 거칠음’을 보여주지 못했다. 가장 문제적인 과거사 사안에 대해 침묵했다. 현대사의 흑역사들에 대한 재조사와 재규명을 하지 않았다. 그리고 마침내 치명적인 역습의 틈을 내주었다. 최순실 사태의 숨은 이면이다.

이를 주도한 것이 PC주의로 무장한 좌파성향으로 기운 현재의 언론계였다. 그리고 박근혜 정권이 보수언론과 불협화음을 내온 결과였다. 우리나라 PC 뒤에는 온갖 어둠의 세력들이 숨어있다. 체제 부정세력의 위장수단이다. 단적으로, 북의 난수방송이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이 땅에 그것을 듣고 행동하는 세력이 엄연히 존재한다는 뜻이다. 간첩. 그 표현조차 사용을 금지한 정권도 있었다. 간첩은 없다. 그것이 이적논리다. 냉전이 끝난 미국과 러시아 사이에도 간첩 맞추방 사건이 있었다. 군사대치 중인 한반도에 간첩이 없다는 말은 PC처럼 위선적이고 은폐적이다.

박근혜 대통령의 잘못은 결코 작지 않다. 그러나 적에게 결재를 받고 비밀보고서를 넘기는 세력이 그 대안이 될 수는 없다. 대한민국의 딜레마가 여기에 있다. PC 뒤에 숨은 적들이 문제의 핵이다. PC는 다수의 지배에 의한 피해를 받지 않도록 소수 약자를 위한 보조적 안전 창치다. 그러나 PC가 NC를 지배하려 들면 세상이 뒤집힌다. 적들은 그렇게 이 사회의 전복을 기획해왔다.

PC를 이기는 전략은 NC다. 위선은 본성을 이기지 못한다. ‘정치적 올바름’보다 ‘자연적 올바름’이 먼저다. 미국은 트럼프라는 이름으로 그 여정에 올랐다. 우리는 무엇을 할 것인가. 그저 광화문의 촛불만 하염없이 쳐다볼 것인가. 아니면 인류보편의 가치, ‘자연적 올바름’을 무기로 이기는 싸움을 할 것인가.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