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사태] 시민군 VS 진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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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사태] 시민군 VS 진압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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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군 총기 무장 시점은 언제였나?

^^^▲ 영화 '화려한 휴가'^^^
조총련이 김일성의 지령에 따라 광주사태 선동 공작에 벌이고 있을 때 조총련의 간계에 말려든 독일인기자 위겐 힌츠페터가 촬영한 바로 KBS가 "푸른 눈의 목격자"라 부르는 영상물이 지난 27년간 5, 18 유언비어 확산에 이용되어 왔으며 계엄군의 발포 이전 시민군의 무장과 이들의 발포가 시작되었음을 증명하고 있다.

광주사태의 증거물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시민군의 무장시점이다. 시민군이란 명칭은 본래 미국의 참전을 저지하고 월남을 적화하는 방법으로 1975년 월맹군이 중부 다낭에 설치한 것으로 인민혁명군이라 부르기도 하였다. 월남의 인민혁명당과 남한의 인혁당(인민혁명당)은 1975년에 같은 박자로 움직이고 있었던 것이다.

518측에서 광주폭동이 민주화운동이라고 주장할 때에 가장 큰 장애물이 민간인이 총기 무장한 사실이며 따라서 5.18논리는 총기 무장 시점을 최대로 늦추며 5월 21일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지어낸다.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이란 시민군 총기조작 오발 사고로 네 명의 시민군이 사망한 사건을 가리키는데, 그것을 군인들에게 뒤집어씌우려 집단발포 유언비어를 지어내더니,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조준사격으로 영상화하였다.

이 영화에서 가장 핵심적인 장면은 시민군 총기 무장 시점이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후로 비쳐지게 하는 것이었으리라.

KBS가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영상물을 지나치게 우려먹지 않았다라면 그런 속임수는 좀 더 오래 지속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27년 전 힌츠페터의 광주사태 영상물이 518무장단체의 무장시점이 언제이었는지를 명확하게 밝혀준 셈이며 그가 찍은 영상물은 5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여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광주를 떠나기까지의 시민군의 모습을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5월 20일에 이미 시민군은 군용 트럭을 타고 다녔으며 총기를 소지하고 있었다.

광주사태에는 광주시민들이 몰랐던 사실, 탈북자들이 알려주는 사실이 있다. 광주사태 동안 시내의 시민들은 모르고 있었으나 무장 시민군이 5월 19일부터 광주에서 27키로 떨어진 나주경찰서 등을 습격하며 무기를 탈취하고 있었다. 나주경찰서 기록이 최초 무기 피탈 날자가 19일이었음을 밝히며, 시민군이 나주에서 무기탈취한 날을 기념하여 김대중정권 때 518단체가 세운 나주예비군대대 무기고(사적비2호)가 그 사실을 입증하되 518측이 부정하는 사실이다.

힌츠페터의 송고에 의거하여 독일 방송은 5월 21일 전체 시민군이 20만명이 넘었으며, 그 중 무장시민군 수가 3만명이 넘었다고 보도하였다. 갑자기 3만명이 넘는 시민군이 어디서 총기가 났다는 말인가?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는 트럭으로 동네 무기고를 부수고 무장하지만, 동네 파출서에 그렇게 무기가 많은 것도 아니고, 더구나 공이를 제거해서 격발이 안된다. 따라서 영화 "화려한 휴가"는 현실성이 없다. 도대체 시민들이 어떻게 무기고 총기에는 공이가 없다는 사실을 알고 공이를 준비했을까? 아직껏 풀리지 않은 광주사태의 수수께끼이다.

이러한 수수께끼들에 대한 실마리는 탈북자들의 증언이 제공해 준다. 그들의 증언에 따르면, 무기 탈취는 여러 달 머리를 장발로 기르고 서울말을 익힌 북한군 특수부대가 하였다는 것이다. 모든 시민군의 증언이 그 사실을 뒷받침해준다. 이십 만 명의 시민군 중 아직 그 누구도 자신이 무기 탈취를 선동했다고 나서는 이가 없다.

광주민주화 유공자는 무수히 많되 무기 탈취범은 없다. 만약 정말로 광주시민 중에는 무기 탈취를 선동한 이가 없었는데도 무기가 탈취되었다면 결국 북한군 특수부대가 무기 탈취를 선동하였다는 증언이 입증된다. 시민군 역시 낯모르는 이들에게 선동되어 나주경찰서 등 광주 외곽 경찰서들을 습격하며 무기 탈취했었다고 이구 동성으로 증언한다.

힌츠페터는 5월 20일 광주에 도착하였다. 그런데 그가 본 것은 군용 트럭을 타고 광주 중심지로 들어가는 시위대 차량 행렬이었다. 곰곰히 생각해 보라. 실로 이상한 일이 아닌가? 만약 시위대가 광주 중심지에 있었다면 광주 중심지에서 바깥 방향으로 이동하였을 터인데, 광주 외곽에서 광주 중심지로 향해 달리고 있었다. 그들은 마치 소풍이라도 가는 기분으로 군용 트럭을 타고 달리고 있었다. 아래 동영상에서 애국가가 배경 음악으로 들리지만, 그것은 KBS의 음향 편집이요, 실제로는 어느 나라 국가를 불렀는지, 어떤 노래를 불렀는지 모른다.

만약 광주민주화 유공자는 무수히 많되 무기 탈취를 선동했다는 이는 아무도 없으면 이제는 탈북자들의 증언을 경청해 볼 차례이다. 만약 탈북자들의 증언이 사실일 경우 군용 트럭의 인물들 중에는 북한군이 있었다. 따라서 위 영상물은 무기 탈취를 선동한 북한군 및 자생 간첩단 역할을 하며 북한군에 무기고 소재를 알려준 이들의 모습을 관찰할 수 있는 귀중한 사료가 된다.

그런데, 트럭 위의 인물들 중에는 북한군에 희생당할 인물들도 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시민군으로 위장하고 시민군 틈에 섞여 있던 북한군은 뒤에서 시민군을 쏘아 죽인 뒤 국군이 죽였다는 유언비어를 퍼뜨렸으며, 이것이 초창기 총상은 대한민국에 없는 무성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던 이유였다. 그들이 광주사태를 일으키기 위해 침투할 때 소지한 총은 동유럽산 무성총기였다.

힌츠페터의 동영상 전체를 보면 총기에 대한 전문가는 아니었으면서도 시민군 총상 방향에 대하여 의문을 품는 장면이 나온다. 시민군들 역시 군인이 전혀 없는 지역에서 시민군 방향에서 시민에게 날라온 총탄에 의한 사망 및 부상에 대하여 수수께끼 Question 부호를 그들의 증언에 크게 찍어 놓는다. 시민이 죽었다. 그러나, 시민군 목격자들 역시 군인이 없는 곳에서, 시민군 방향에서 날아온 총탄이었음을 증언하며, 광주의사들 역시 시민군에게만 있는 총기에 의한 총상이었다는 소견을 남겨놓았다.

5월 20일 이미 시위대가 군용 트럭을 타고 다니며 무장하기 시작하였음을 명확히 증언하는 힌츠페터의 영상물은 또한 시민군에게 실탄이 지급된 시점을 명확하게 입증한다. 항간의 깊은 오해와 달리 광주사태 동안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었다. 사병들에게 실탄을 지급하는 것은 곧 발포 명령을 의미한다.

실탄이 지급되어야 발포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검찰과 과거사위가 발포 명령자는 없었다고 발표하였을 때 그 의미는 사병들에게는 전혀 실탄이 지급된 적이 없었다는 의미이다. 5월 21일 한시경 시민군 장갑차가 도청광장에서 군인들을 깔아죽이기 시작하였을 때 장교들에게만 공포탄 몇발씩 지급된 것을 가리켜 발포 명령은커녕 실탄 지급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다. 조준사격은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되어야 가능한 것이기에 영화 "화려한 휴가"는 터무니 없는 왜곡인 것이다.

항간의 유언비어와 달리 공수부대에는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으며, 5월 21일 공수부대는 광주를 영영 떠났다. 힌츠페터의 무식한 발언을 인용한 518 영상물에서 공수부대가 5월 27일 옷을 갈아입고 다시 나타났다는 나레이션이 종종 등장한다. 그러나, 5월 27일 새벽 도청진압작전을 위해 동원된 병력은 20사였으며, 20사는 공수부대가 아니다. 이점에 관한 한 힌츠페터는 정말 무식하였음에도 518 영상물에서 그 무식이 27년째 재생산되고 있다.

5월 27일 새벽 최규하 대통령이 군 자위권 발동 재가를 해준 병력은 20사였으며, 공수부대 사병들에게는 실탄이 지급된 적이 없다. 5월 27일 새벽 시민군이 선제 사격하여 20사 소속 사병 3명이 사살되었기에 자위권이 발동되어 맞사격이 있었다. 그러나 공수부대는 사격한 일이 없음에도 독일인 힌츠페터의 무식 때문에 한국의 특전사가 여태껏 누명을 쓰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김대중 최측근 윤상원의 간사한 달변에 현혹되어 518시민군 옹호에 여생을 바쳤던 힌츠페터의 영상물이 아이러니하게도 시민군의 치부를 폭로한다. 공수부대 편에서는 사지에 몰려서도 실탄이 지급되지 않았는데, 시민군 편에서는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분명히 실탄이 지급되었다. 힌츠페터는 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것을 보자 섬뜻 위기감을 느끼고 급히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는 5월 21일 도청광장 충돌 이전에 광주를 빠져나갔다. 그러나 그의 녹음장비는 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되는 장면을 포착하였다. 이것이 518무장시민군에 실탄이 지급된 시점에 대한 명확한 증거물이다.

<자료출처-역사학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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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동문 2007-10-22 22:43:16
1980년 5.19일 오후3시 처음 무기고가 피습되고..

1980년 5월 19일 오후3시- 나주 예비군대대 무기고가 피습되고 1600여정의 총기가 탈취되던 날!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빨리 대피하시오. 서울에서 접한 소식은 광주지역 방송국 은 물론 신문사도 피습되어 불에 타고 있다는 거요. 지사 간판도 내리고 피신하시오"응답도 못한체 전화가 끊긴다.

사무실 기둥에 걸린 간판을 떼려고 현관 문을 나서는 찰라에 요란스런 함성과 굉음소리에 놀라 재빨리 창문을 닫았다.

신의주1호선인도로에는 삽시간에 각목과 쇠 파이프 그리고 칼빈총으로 무장한 시위대가 도로를 점거한 후 복면으로 얼굴을 가린 장발족의 청장년들이 차창 밖으로 몸을 내민체 요란한 함성을 지르고 목포 와 영암 방향으로 질주하고 있었다.

박경장과 유리창에 새겨진 신문사 제호를 떼다 말고 황급히 창문을 닫았다. 박 경장이 200미터 전방에 있는 금성동파출소 옆 예비군 무기고를 걱정한다.그곳은 나주읍내에서 예비군 무기가 가장많이 보관되어 있는 곳이다.

경비전화는 불통이고 일반 전화로 금 파를 불렀으나 응답이 없없다. 아마 파출소 경찰들도 이미 철수를 한 모양이다. 제발 총기나 은닉하고 철수 하기만을 바라는 마음이다.

이 때 광주 아시아자동차(방위산업체)에서 생산한 군용트럭이 사무실 앞을 질주하며 파출소 쪽을 향해 소음을 내며 달린다.

파출소 방향으로 질주하던 군용트럭은 갑자기 무기고 부럭담장을 향해 돌진, 무기고를 박살 내고 있다. 19일 오후 3시, 곧바로 요란한 총성이 들려온다.

이 때 사무실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문을 여니 겁에 질린 보안대 주재관 0 준위가 사무실 문턱에서 자신의 허리춤을 만지며 권총을 찾는다.

내 권총! 내 권총!" 빈 허리춤을 더듬으며 마치 실성한 사람처럼 오른손을 흔든다. "이 사람 정신차려"어깨를 감싸주며 진정을 시켰다.

박경장이 건네준 냉수 한 컵을 단숨에 들이마신 그는 "김대중의 내란 폭동이야"외치며 정신없이 도망쳐온 경위를 설명했다.

이준위가 나주군청 군수실을 찾아가 유군수를 금성산 5포대로 피신토록 한 후 군청 정문을 나서는데 몽둥이와 각목을 든 20여명의 청장년들이 군청 앞 에 몰려 있고 그 중 낯익은 30대 후반의 대장 격인 듯 한자가 지휘를 하는데 그는 나주 사람도 아닌 함평 사람으로 유일한 김대중의 지지자로 재야 활동을 한 사람이며,

고향에서도 유관기관을 떠돌며 활부 책장사를 하며 평소 자신과 호형 호제하던 사이인데도 이날 따라 몽둥이를 든 체 "어이! 보안대장 어디 가는가?" 라며 정색을 하자 이에 놀라 500미터 거리인 이곳까지 2키로나 골목길을 헤매며 줄달음쳐와 사무실 앞에서 정신을 잃을 정도까지 된 것이다.

이준위에게 금 파 무기고가 조금전에 피습된 경위를 알려줬다. 그는 예비군 대대장과의 전화 통화에서 들려온 소식은 충격과 함께 엄청난 일이 벌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피습 당한 무기고에는 M1, 칼 빈 소총 1600정. 중화기인 M60기관총과 수류탄이 든 상자 등이 보관 되 어 있다는 것이다. 우리 세 사람은 안절부절 어쩔 줄 모르고 발만 구르고 있다.

정확히 무기고가 피습된 시간은 5.19일 오후 3시다. 사무실에 묶인 우리 세 사람은 긴장된 상태에서 아무도 입을 열지 못한 체 서로 얼굴만 쳐다보고 있다.

이때 전화 벨소리에 재빨리 수화기를 집어 들었다. 서울지사 오 부장이다. "김 차장 긴급 상황이요 지금 광주 본사가 불타고 있고 본사 식구들도 이미 철수했으니 김 차장도 빨리 대피하시오" 청천 벽력같은 소식에 우리 세 사람은 기겁했다.

우선 함평이 고향인 이준위가 함평지역 무기고를 수습하기위해 출발을 서둘며 나주 역으로 전화를 했다.

김동문 님께 2007-10-15 19:28:43
김동문 님께서 작성하신 기사 "무기고 탈취 현장에 세운 민중항쟁 사적비 1호?"를 흥미롭게 읽었습니다.

기사 중에서 님께서 쓰신 다음의 명제를 입증하는 증거를 보다 상세히 알고 싶습니다.

"소총1600여정 M60기관총을 비롯 다량의 수류탄이 탈취된 시간은 5월19일 오후1시-3시 사이며..."

이 명제 사실임을 입증할 구체적 증거를 확인하였을 것으로 추측합니다만, 그 증거라는 것이 무엇인지 기사는 분명히 말하지 않고 있습니다. 5월 19일 나주 금성동 무기고가 오후 1시에서 3시 사이에 피탈당하였으며 피탈된 화기, 탄약이 구체적으로 무엇이었는지 밝혀 주는 사료를 확보하고 계시면 공개하여 주실 수 있을까 묻습니다.

그럼 추워지는 날씨에 건강하시길 빌며 답변 주시기를 기다립니다.

79학번 2007-10-15 19:20:13
시민 저항권에 입각하여 무장 항거의 정당성 천명한 1980년 5월 25일 광주 성명서 79학번 07/10/15 [19:22]
5월 18일 00:01시 전국 계엄령 발령과 함께 전북대학교 학생회관에서 개시된 계엄군의 양민 살상 (이세종 군 등), 부터 5월 19일 광주고 앞 발포 (김영찬 19세 등), 5월 20일 광주 역 광장에서의 조직적 발포 등으로 살상당한 시민들 (김재화 26세, 김만두 45세, 이북일 28세 등)의 유린당한 생존권은 자연히 시민자위권을 발동시키는 것으로 아래의 성명에서 이를 드러내 밝히고 있습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나?」 성명 전문

먼저 이 고장의 민주주의를 수호하기 위해 피를 흘리며 싸우다 숨진 시민, 학생들의 명복을 빕니다.

우리는 왜 총을 들 수밖에 없었는가? 그 대답은 너무나 간단합니다. 너무도 무자비한 만행을 더 이상 보고만 있을 수 없어서 너도 나도 총을 들고 나섰던 것입니다.

18일 아침, 각 학교에 공수대를 투입하고 이에 반발하는 학생들에게 대검을 꽂아 ‘돌격 앞으로’를 감행하였고, 이에 우리 학생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정부 당국의 불법처사를 규탄했던 것입니다.

그런데, 아 이럴 수가 있단 말입니까? 계엄 당국은 18일 오후부터 공수대를 대량 투입하여 시내 곳곳에서 학생과 청년들에게 무차별 살상을 자행하였으니!

아! 설마, 설마 했던 일들이 벌어졌으니! 우리 부모 형제들이 무참히 대검에 찔리고, 차에 깔리고, 연약한 아녀자들이 젖가슴을 짤리우고, 차마 입으로 말할 수 없는 무자비하고도 잔인한 만행이 저질러졌습니다.

또한 나중에 알고 보니 군당국은 계획적으로 경상도 출신 제7 공수병들을 보내 지역감정을 충동질했으며, 도구나 공수대를 3일씩이나 굶기고, 더더구나 술과 흥분제를 복용시켰다 합니다.

시민 여러분! 너무도 경악스런 또 하나의 사실은 20일 밤부터 계엄당국은 공식적으로 발포명령을 내려 무차별 발포를 시작했다는 사실입니다.

이 고장을 지키고자 이 자리에 모이신 민주시민 여러분! 그런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이겠습니까? 묻고 싶습니다. 우리는 더 이상 당할 수만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이 고장을 지키고 우리 부모형제들을 지키고자 손에 손에 총을 들었던 것입니다.

그런데도 정부와 언론에서는 계속 불순배, 폭도로 몰고 있습니다.

여러분! 잔인무도한 만행을 일삼았던 계엄군이 폭돕니까, 이 고장을 지키겠다고 나선 우리 시민군이 폭돕니까!

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은 온갖 방해에도 불구하고 여러분의 안전을 끝까지 지킬 것입니다. 또한 협상이 올바르게 진행되면 우리는 즉각 총을 놓겠습니다.

민주시민 여러분! 우리 시민군을 절대적으로 밀어주시고 적극 협조해주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

1980. 5. 25. 시민군 일동

79학번 2007-10-15 19:18:48
법리상 시민의 저항권은 군의 자위권에 앞선다 - 선제 총격 없이는 누구도 발동 못 해

79학번 07/10/15 [18:59]

이 주장은 성문법인 대한민국 헌법이 419저항에 의한 민주주의 공화국 성립의 대원칙을 천명하고 있음은 물론, 불문법인 자연법적 전통에 따라서 역시 근대 시민사회의 대표적인 국가시민의 권리라는 원리에 근거하고 있습니다.

계엄군이 전군 사령관 회의에서 이희성의 발의와 전두환 당시 "각하"의 특명에 의해 발동을 종용받은 소위 군 초병의 자위권 역시 별 나라의 근거 전무한 조항이 아닌 바로 시민의 저항권이라는 대 원칙에 입각한 것인 즉, 먼저 총격 도발 없이 총격을 가하는 것은 피해자의 정당방위가 아닌 선제 공격으로서 가해자의 범죄가 성립합니다.

79학번 2007-10-15 19:17:52
내신 기자가 전하는 5월 20일 계엄군 발포 사태 79학번 07/10/15 [18:39]
광주 역 쪽에서 20일 수백 발 총성, 하늘을 가르는 무수한 붉은 빛

5월 20일, 22시 55분

*광주 역 쪽에서 군인들이 수백 발 발포하고 있음. 취재접근 어려움. 중요서류, 직원들이 도청으로 옮김. 총 쏘고 시민 함성소리...... 무법천지 공포의 도시. 유난피해 우려. 도청에서 서 기자 탈출. 사진기자 이영배씨 지사 쪽에 있는 듯. 발포피해 상황 아직 모름. (#조선일보 취재일지)

*본사에 기사를 송고하고 있을 때 광주 역 쪽에서 이날 처음으로 총성이 울리기 시작했다. 수백 발의 총성이 계속 났다. 밖에 뛰쳐나가 보니 그것은 공포탄이 분명했다. 빨간 불덩이가 쉴새없이 서쪽으로 날아가고 있었다. 불길한 징조였다. (#조선일보 취재일지)

5월 20일 23:00 시

*M16 100여 발의 총성. 927명이 연행됨. 금남로에서 50여 대의 차량이 파괴 또는 전소됨. 시청이 일부 파괴됨. 이날 밤, 10,000여 명이 공용터미널에서 철야.

*중심지(금남로)에서 데모주력 시민들이 강제진압(군인들이 페퍼포그 쏘아)으로 흩어짐. 중심지 옥상에서 사진기자 이영배씨와 같이 있음. 광주시청 앞에서 11시에 사격개시. 1백여발 유탄 50여발은 공중으로 날아가고 나머지는 안보여. 공포위협 사격인 듯. (#조선일보 취재일지)

- 「광주민중항쟁일지」, 한국현대사사료연구소, p.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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