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시간.
태진과 진희는 거실 소파에 깊숙이 몸을 묻고 모닝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 텔레비전에서 뉴스 속보가 보도되고 있었다. 어느 새 비디오 테이프를 편집했는지, 민철국이 쇠고랑에 매달려 몸부림 치며 죽어가는 장면을 뿌옇게 화면 처리를 해서 내보내고 있었다. 긴급하게 구성된 프로그램에 사회 각계 각층의 명사들이 나와 이 일련의 살인 사건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까지 했다.
진희가 계란 프라이를 넣은 토스트를 한입 베어물고 말했다.
“이제 다음 대상을 찾아야죠?”
“그래야지.”
“뒤가 구린 사내들은 지금쯤 가슴이 조마조마할 거예요.”
“당연히 그렇겠지.”
태진은 진희를 보며 말했다.
“한꺼번에 여러 놈을 잡아들일까?”
“그만큼 위험 부담이 따르지 않을까요?”
“물론 그렇겠지만, 이 사회에 경종을 울린다는 면에서는 그게 더 효과가 있을 거 같다는 생각이 들어.”
“텔레비전에서는 우리가 녹화한 것을 차마 시청자들에게 그대로 보여주지는 못하지만, 주간 신문과 잡지에 실린 끔찍한 사진들만으로도 효과가 있다고 봐요.”
“길거리에서 들은 얘긴데, 청계천 세운 상가와 용산 전자 상가 같은 곳에서는, 우리가 녹화한 비디오 테이프가 비밀리에 복사돼 고가로 팔리고 있대.”
“어머, 그게 정말일까요?”
“글쎄, 직접 확인은 못 했어.”
“우리가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요? 그렇게 되면 우리가 바라는 목적이 더 쉽게 사람들에게 전해질 수 있는데. 다음부터는 세운 상가 같은 곳에 몇 개 뿌리는 것도 하나의 방법이 되겠어요.”
“효과를 극대화하기 위해서는, 시간 간격을 두지 않고 연속적으로 대상을 납치하는 게 좋겠지?”
“그 점은 저도 대찬성이에요.”
“이번의 민철국은 지독한 놈이었어. 어떻게 만 이틀이 지나도록 그렇게 끈질기게 숨이 붙어있었는지.”
“죽기 싫었나 보죠.”
태진은 굶주릴 대로 굶주린 개미 떼에게 자신의 사타구니가 무자비하게 물려 뜯기면서도 잡초처럼 끈질긴 생명력을 보여주던 민철국의 얼굴이 떠올랐다. 마지막 순간까지도 목숨만은 살려달라고 눈물을 흘리며 애걸하던 그의 모습이 뇌리에 깊게 각인되어 지워지지 않았다.
“…… 불쌍하다는 생각도 들었어.”
“그런 동정심은 갖지 마세요. 우린 지금 인간 쓰레기들과 전쟁을 하는 중이에요.”
“어떻게 그렇게 많은 여자들을 마음대로 유린할 수 있었을까?”
“여자들에게도 문제가 있다고 봐야죠. 그저 인기 연예인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헤프게 치마끈을 푸는…….”
진희가 심드렁하게 말했다.
하긴 태진도 방송국에서 녀석이 여자들과 킬킬거리며 진한 농담을 주고받는 것을 여러 번 보았다. 녀석은 아예 방송국 근처에 오피스텔까지 얻어 놓고 있었다. 명목은 짬짬이 쉬기 위해서라지만, 여자들을 호텔로 데리고 갈 경우 신분이 노출되는 것을 꺼린 속셈이었다는 것을 이번 조사로 알게 되었다.
“이번에는 여자를 하나 낚아요.”
“여자를?”
“그래요. 쓰레기들에 남자들만 있는 것은 아니잖아요.”
“그렇긴 하지만…….”
솔직히 태진은 여자라는 말에 망설여졌다.
“실은 민철국을 조사하면서 우연히 알게 됐는데, 요즘 잘 나가고 있는 패션 디자이너 나리라가 어때요?”
“나리라?”
“민철국을 먼저 꼬드긴 것도 그녀고, 한 마디로 걸레도 그런 걸레가 없어요. 걸레는 어디까지나 걸레라고요. 아무리 깨끗이 빨아도 행주로 쓸 수는 없잖아요. 그 걸레가 웬만한 남자는 그냥 두질 않았더라고요.”
“이제 서른살을 갓 넘긴 미혼이라고 알고 있는데?”
태진은 그녀에 대해 잘 알지는 못했다. 공식적인 자리에서 우연히 몇 번 얼굴을 마주쳐 눈인사를 나눈 정도였다. 첫인상은 괜찮았다. 깔끔한 용모에 화사한 이미지를 주는 여자였다. 무엇보다 자신의 일에 대단한 자부심을 갖고 있는 여자라고 느꼈었다. 프랑스에서 십 년 이상 패션 디자인 공부를 하고 돌아와 그 바닥에서는 알아주는 여자였다.
특히 연예인들과 스포츠 스타들이 그녀의 옷을 선호했다. 연예인 치고 그녀가 디자인한 옷을 한 번도 입지 못했다면, 아직은 인기 연예인 축에 끼지 못했다는 증거라는 말까지 떠돌 정도였다. 그녀는 인기 연예인들에게는 자신이 직접 디자인한 옷을 한 번 이상 선물하기 때문에 연예인들과 친분이 두터웠다. 그런 연유로 신인들은 그녀에게서 옷 한 벌을 얻어 입기 위해 안달이 날 지경이라고 했다. 신인 중 ‘누가 나리라로부터 옷을 선물받았다’라는 소문만으로도 일약 인기 연예인으로 발돋움할 수 있는 계기가 됐기 때문이었다.
“확인된 것은 아니지만, 나리라가 색녀라는 소문이 파다해요. 연예인들은 물론 스포츠 스타들까지 좀 논다 하는 남자들은, 그녀를 거치지 않으면 바보 축에 든다는 거예요. 특히 그녀는, 한창 싱싱하게 물이 오른 어린 스타들을 좋아하는 습성이 있대요.”
태진은 진희의 말 중 '‘싱싱하게 물이 오른’이란 표현이 재미있었다. 진희의 언어 구사력이 많이 늘었다고 생각했다. 처음 만났을 때만 해도 이렇지 않았었다. 별로 말이 없었고, 어떤 상황에 대한 설명도 있는 그대로 전달하는 수준이었다. 비유법이나 은유법 등을 거의 사용하지 않았다. 그런데 자신과 어울리면서 어느새 표현력이 상당한 수준에까지 올라와 있었다. 그런 진희를 보고 있자니 빙긋 웃음이 머금어졌다.
“왜 나를 보며 웃어요?”
“아, 아냐, 아무것도.”
태진은 황급히 웃음을 거두었다.
“오늘 뭐 할 거예요?”
“특별히 할 일이 없는데, 왜?”
“소영 씨 안 만나요?”
“촬영 때문에 로마에 갔어. 며칠 더 있어야 올걸.”
“두 사람 사이는 잘 돼가고 있죠?”
“그렇다고 볼 수 있지.”
태진은 마치 남 얘기를 하듯 말했다.
“무슨 말이 그래요? 잘 되면 잘 되고, 안 되면 안 되는 거지.”
진희가 곱게 눈을 흘겼다.
“잘 돼. 너무 진행이 잘 되고 있어서 은근히 걱정이 될 정도야. 이제 됐어?”
“소영 씨에게 써먹어 봤어요?”
이번에는 진희가 빙긋 웃음을 머금고 은근한 목소리로 물었다.
“뭘 써먹어?”
태진은 진희의 말 뜻을 알아듣지 못했다.
“뭐긴 뭐예요, 선생님 남자지.”
태진은 얼굴이 붉어질 일도 아닌데 자신도 모르게 붉어졌다. 어쩜 저렇게 얼굴색 하나 변하지 않고 그런 질문을 할 수 있을까.
“알아서 생각해.”
“상대방 질문에 대답을 안 하는 것은 긍정을 뜻한다면서요?”
“당했군.”
태진은 유쾌하게 소리내어 웃었다. 진희도 따라 웃었다.
“좋았어요?”
“그것도 알아서 생각해.”
“그럼 좋았다는 얘기네요?”
“말 못 해!”
“사랑하는 사람과 한몸이 되는 그 순간의 느낌은 어떤 것일까?”
진희는 장난기 어린 표정으로 태진의 얼굴을 빤히 보며 혼잣말처럼 말했다.
“계속 장난칠 거야?”
태진은 기습적으로 몸을 던져 진희를 억세게 끌어안으며 키스를 퍼부었다. 진희는 뿌리치려고 마음만 먹으면 얼마든지 뿌리칠 수도 있으련만 그대로 있었다. 진희의 입술은 낯설지 않았다.
“그만 해요.”
진희는 잠시 후 태진의 몸을 밀어냈다.
태진은 생각했다. 왜 진희와 소영에게서 느끼는 키스의 느낌이 이토록 다른 것일까를. 소영에게서는 잘 익은 과일 같은 달콤함과 풍부함을 느낄 수 있다면, 진희에게서는 유월의 풀밭에서 느낄 수 있는 싱그러움과 산뜻함이 있었다. 같은 여자의 입술인데도 두 사람이 주는 느낌은 그렇게 달랐다. 굳이 꽃으로 표현한다면, 소영이가 장미라면 진희는 달맞이꽃 같은 느낌이었다.
“이번 나리라 뒷조사도 제가 할게요.”
“진희가?”
의외였다. 지난번에도 진희가 뒷조사를 위해 많은 시간을 투자했기에, 이번 일만은 자신이 하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제가 하고 싶어요.”
“힘들지 않아?”
“재밌어요.”
진희는 분명 재미있다고 했다.
태진으로서는 진희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 면도 있었지만, 크게 신경 쓰지는 않았다. 늦게 배운 도둑이 날 새는 줄 모른다더니, 진희가 그런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어. 그럼 진희가 추진해 봐. 조심하고.”
[계속]
뉴스타운
뉴스타운TV 구독 및 시청료 후원하기
뉴스타운TV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