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젖은 깍두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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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물젖은 깍두기 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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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의 1주기를 맞아

외할머니께서 깍두기를 참 좋아하셨다.

일제시대로 거슬러 올라가면 보통학교시절 일본인교사하에서 수업을 받으면서 도시락시간이 되면 항상 도시락검사를 하였고 김치가 들어간 도시락은 통째로 창밖으로 내다버렸기때문에 그날 점심은 꼬박 굶기 일쑤였다.

"왜 오늘도 굶었어?"

'선생님이 도시락을 다 갖다버린단말야.'

"그러면 이렇게 하면 어떻겠니...'

밥 위에 불고기와 깍두기를 얹어 김을 말아 가지고 간 다음날 부터는 교사의 눈을 피할 수 있었다.

이렇게 일제때도 풍파없이 살아 온 외할머니는 동족간의 전쟁으로 식구들을 모두 잃고 홀로 삼남매를 키워오다 반세기가 흐른 지난해 9월 하늘나라로 가셨다.

그런 외할머님과 외할아버지를 존경해 왔지만 돌이켜보면 외할아버지가 원망스럽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는 오늘날의 삶이다.

만약 외할아버지께서 그때(정동교회 시절) 대통령의 말을 듣고 경무대로 갔더라면 지금의 나의 인생은 달라졌을것이라는 생각에 지난일을 후회한들 무엇하겠냐마는 말이다.

이것을 두고 욕심이 너무 지나쳐도 탈이지만 너무 없어도 탈이라는 말이 있는게 아닌가 싶다.

대통령께서 같은교회 교인을 주치의로 영입하려 했던것은 주변의 의사들 가운데 유일한 신자였고 서로 말을 주고받는 등 가까이 지내왔기에 그분을 계속해서 자신의 곁에 두고싶어했던 이유였다.

문득 성산 장기려박사가 떠올랐다.

한국의 슈바이처라는 장 박사의 행보를 이어받으려는 생각으로 의료활동을 했던 것이다.

조만식 선생이 평양에서 일경에 쫒기고 있을때 그를 안내하여 장 박사가 운영하는 병원에 환자로 위장케 한 사례가 있었다.

세 분 모두 크리스천이었고 그 인연으로 매우 가깝게 지내오다 조만식은 후퇴하던 북한군들에 의해 생을 마감했으며 장기려 박사만이 유일하게 부산 고신병원에서 지난 95년 동란때 헤어진 아내를 두고 생을 마감했다.

이 모두 이념대립이 만들어 낸 비극이었다.

동족상잔의 비극은 조부때부터 섬긴 종교까지 바꾸어 놓았다. 그러나 임종직전 옛 신앙을 회복하고 눈을 감으셨으니 평안하게 하늘나라로 갔으리라고 믿는다.

어느덧 1주년이 되었다.

삼가 외할머니의 명복을 빌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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