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호혈의 김해시 산해정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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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호혈의 김해시 산해정 기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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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양산은 승양이가 처분만을 기다리는 형국

산해정은 남명 조 식 선생께서 30년간 강학하던 곳으로 조선 선조 21년(1539)행인들의 청에 의해 김해부사 양사준이 정자의 동쪽에 서원으로 착공했으나 왜란으로 중지된 것을 광해군 원년(1609)에 안희, 허경윤에 의해 준공되어 신산서원이라고 사액되었다.

그 후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철거되었다가 순조 20년(1815) 송윤중 등이 다시 중건한 것으로써 사당영역이 없이 강학공간만으로 이루어진 서원형식을 가지고 있다.

남명의 사상적인 내용은 아래에서 보충 설명키로 하고 5일 어린이날 산해정 뒷산을 등산한 목적은 요즈음 풍수 물형론에 복호형(호랑이가 앉아 있는 형국)의 표본이라는 강영훈 교수의 풍수이론에 심취하여 자주 그 블록 찾아 시간나면 읽고 있다.

필자는 풍수가가 아니라는 전제하에 나름대로의 산행기행문을 적어보는 것임을 밝힌다.

아침을 먹고 평소와 마찬가지로 준비된 베낭에 물 한 병 담고 버스정류소입구에서 김밥한 줄 천원어치 넣어 부산에서 김해 가는 시내버스로 선암다리에 내려 대동 가는 길로 약 이십 여분 걸어 들어가는데 남명 조식선생께서 후학을 양성하신 신산서원(김해시 대동면 주동리 737:문화재 자료제 125호)인 산해정이 나온다.

이 산해정 뒷산이 복호혈의 표본이라고 해서 등산을 하기로 결심한 곳이다. 먼저 사진에서 호랑이 형상인지를 한번 감별 해보는 것도 좋은 공부가 될 것이다. 이 산 대부분이 낙엽송 도토리나무 인데 특별한 곳에만 소나무가 서있다. 즉 꼬리가 몸통중간을 감고 있는 모습 등.

이산에는 등산로가 없다. 산해정에서 이쪽저쪽을 살펴도 일반인이 올라가는 길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무조건 산해정 뒷산을 오르기로 결심했지만 막상 길 없는 등산에서 느낌은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을 부르게 되더군요.

한참을 오르다가 주인 없는 산소 몇 기를 보았는데 아마 호랑이라면 호랑이 코 등 정도 되는 곳이라고 보여 지고 또 한참을 올라가니까 묘지 이장한 곳이 수평으로 두 곳이 보였다. 이곳은 호랑이 눈 정도의 위치로 보였다.

그 외에도 여러 곳을 보았지만 산소에 대해서 복호혈에 호랑이 코 등에 안장 발복, 호랑이 눈 자욱에 안장발복 이라는 나 같은 사이비 풍수에 속은 자손이나 그것을 명당이라고 알려준 지사나 지금은 대부분 이생을 하직했을 텐데 지금쯤 영생극락 했는지도 궁금한 생각이 떠오른다.

어떠한 책에는 묘지를 너무 높은 곳에 쓰면 자손이 찾아오기 어렵다 그래서 손(孫)이 귀하다는 글을 보았고, 또한 호랑이 혈이라고 본다면 호랑이의 맥은 잇발 아니면 발톱이라고 보는데 코등이나 눈 자국에 혈을 쓴다는 것은 가뜩이나 호랑이는 생산력이 약한데 손(孫)이 불어날 확률이 적지 않았나 라고 감히 사료된다. 그나마 눈 자국 두 곳에는 이장을 한 것 같아서 다행이라도 판단이 된다.

또한 복호혈은 주위에 승양이, 토끼, 닭 형상의 물형이 있어야 발흥을 한다는 글을 보았다. 그런데 이곳 정상에 올라 보면 가까이는 중국민항기사고로 소문이 난 돗대봉, 좌측에는 까치봉, 백두산이 있고 멀리는 부산 금정산 고당봉, 상계봉, 구포뒷산 백양산은 승양이가 고개와 꼬리를 숙이고 처분만을 기다리는 형국이고 멀리 마주보이는 승학산 천마산등은 들소가 한가롭게 물을 마시고 되새김질하는 모습이다.

또한 산해정 바로 앞부분에 호랑이 앞발과 같은 위치에 창녕조씨 선산묘소가 있었는데 이것이 흡사 호랑이가 먹이 감을 발톱으로 희롱하는 형국이다. 그리고 호랑이 발톱위치에 축우 사를 크게 하고 있었다.

호랑이는 먹이가 있어야 출림을 한다고 했다. 이곳에 호랑이 먹이는 양 사방에 널려 있다. 그런데 이곳 서당에서 강론하신 남명 조식선생은 벼슬을 하지 않았다. 이것은 호랑이가 출림하지 않은 것이 된다.

미력한 초보지술사의 견해로는 호랑이나 사람이나 출림하여 힘쓰지 않아도 배부른데 굳이 에너지를 소모시킬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형국은 아닌가에 의심이 든다.

실제로 전라도 지리산 서부의 산세는 아기자기한 악기(樂器)의 형상이 많다면 경상도의 산세는 다소 우직한 기풍의 산세가 많다.

그래서 그러한지는 모르지만 경상도에서는 쉽게 행동하지는 않지만 한번 민중의 봉기가 일어나면 나랏님 아니면 정권의 변화가 생긴다는 설이 많았다고 하며 역사서에도 경상도의 민란을 두렵게 기록한 것이 많이 보인다.

이에 남명 조식 선생의 수차례 관료의 추천에도 사양한 것은 이러한 풍수와 관련이 전무하다고 보기는 어렵다 하겠다.

^^^▲ 장영훈풍수강론에서^^^
남명 조식 선생의 언론관에 대하여

남명이 19세 때 일어난 기묘사화(己卯士禍)로 숙부 조언경(曺彦卿)이 조광조의 일파로 몰려 비명에 가고 아버지도 파직됐다. 집안이 쑥대밭이 되자 남명은 고향인 삼가로 내려갔으나 생계가 어려워지자 중종 26년(1531) 살림이 넉넉했던 처가를 찾아 김해 탄동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18년간 학문과 제자 양성에 힘을 기울였다.

남명은 이후 38세 되던 중종 34년(1539) 이언적(李彦迪·1491~1553)의 추천으로 헌릉 참봉에 임명되었으나 나아가지 않았으며, 몇 년 뒤 이언적이 경상도 관찰사로 와서 만나기를 청해도 “대감이 벼슬에서 물러난 뒤에 만나 뵈어도 늦지 않을 것이오” 하며 거절했다. 그 뒤에도 몇 차례 천거되었으나 번번이 사양했고, 1554년에는 벼슬길에 나아가라는 이 황의 권고마저 물리쳤다.

당시 유학자들은 학문을 이룬 뒤 벼슬길에 나아가는 것을 본분으로 삼고 이를 군신지의(君臣之義)로 간주했다. 때문에 남명은 혹평을 듣기도 했으나, 꼭 벼슬에 나아가 왕을 돕는 데만 군신지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며 대도(大道)에 입각해 현실을 비판하고 도를 후세에 전하는 것을 더 중요한 일로 여겼다.

1555년, 또 다시 조정에서 남명에게 벼슬을 내렸다. 그 때까지 묵묵히 벼슬을 사양하던 남명은 조정에서 하는 짓이 모두 눈 가리고 아웅 하는 식이니 한번 크게 잡아야겠다고 결심하고 입을 연다.

“전하! 나라의 일이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이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떠나 버렸고, 민심도 이반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히히 득 그리며 술과 여색에 빠져 있고, 높은 벼슬아치들은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 재산을 긁어모으기에 여념이 없습니다.

…대비께서는 생각이 깊으신 분이기는 하지만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시니 돌아가신 선왕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그러니 백 가지 천 가지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겠습니까.”

재야 학자가 국왕에게 바른 정치를 하라고 주문한 것. 당시 갓 스물을 넘긴 명종은 남명의 상소를 보고 노발대발했다. 승정원(承政院)에 명하여 임금에게 언행을 불손하게 했다는 불경군상죄(不敬君上罪)로 남명을 엄하게 다스리도록 했다. 왕을 보좌하는 승지들은 서로 책임 전가에 바빴다.

오늘날 대통령비서실과 마찬가지인 승정원 신하들이 이러했으니 남명이 정치 개혁을 위해 건의한 내용은 뒷전으로 밀려날 수밖에. 다행히 사신(史臣)들은 올바르게 문제의 핵심을 지적했다.

‘조 식의 상소에 대해 비답을 내리지 않을 뿐만 아니라 도리어 승정원에서 남명에게 죄를 주라고 청하지 않았다고 하여 엄하게 문책하니, 언로(言路)가 막힌 것이 이때부터 더욱 심해졌고 임금의 덕에 누가 됨이 이로 말미암아 더욱 커졌다. 온 나라 선비들은 임금이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알게 되었으니, 결국 모두 비위를 맞추는 데로 몰리게 될 것이다. 임금의 전교가 이러한 것은 온 나라 사람들의 입을 막아 감히 말하지 못하게 한 짓이니, 애석하도다.’

그나마 당시 역사 서술은 바른 길을 걷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조야의 중망을 한 몸에 받던 남명은 이 상소로 인해 임금도 그 위상을 가벼이 볼 수 없는 존재로 성장했다. 재야 언론의 거두가 된 것이다. 조선 건국 이후 임금의 실정을 그처럼 강경한 목소리로 지적한 일이 없었기 때문이다.

몇 차례에 걸친 남명의 격렬한 상소에도 불구하고 왕과 벼슬아치들은 정치를 개혁하겠다는 의지가 없었고, 또 백성을 두려워할 줄 모르고 백성들을 위한 정치를 하겠다는 마음을 갖지 않았다. 이에 대하여 한귀절의 시를 읊었다.

‘배는 물 때문에 다닐 수 있지만 물 때문에 뒤집히기도 한다네. 백성이 물과 같다는 소리, 옛날부터 있어 왔다네. 백성들은 임금을 떠받들기도 하지만, 나라를 뒤집기도 한다네. …단 못된 임금이 어질지 못함으로 인해, 거기서 위험이 가장 크게 된다네.’

당시 체제에 순응하던 여타의 성리학자들로서는 감히 입 밖에 내지 못할 “백성들이 나라를 뒤엎을 수 있다”는 과감한 말을 한 것이다.

남명이 68세 되던 해(1568년) 5월, 새로운 정치를 해보겠다는 결심을 한 선조가 다시 남명을 불렀으나 남명은 역시 벼슬을 사양하면서 긴 봉사를 올렸다.

‘…임금이 수양되어 있지 않으시면 사람을 알아보는 눈이 생길 수 없습니다. 옛날부터 권세 있는 신하나 외척이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혹 있었고, 여인이나 내시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도 혹 있었습니다만, 지금처럼 서리(胥吏: 각 관아의 실무를 보는 아전)가 나라를 마음대로 하는 일은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 정치가 대부(大夫)에게서 나와도 오히려 안 되는데 하물며 아전에게서 나오는 것이겠습니까.…’

‘의’의 깃발 아래 ‘경’의 수련으로 내공을 다지며 산림에 은거했지만 그는 결코 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뇌룡정’에서 읊었다는 좌우명은 남명의 모습을 그대로 보여준다.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 시거이용견 연묵이뇌성“죽은 듯이 있다가 용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침묵하다 우레처럼 소리를 낸다.”

남명은 타락한 권력을 질타하고 무기력한 지식인사회에 일대 경종을 울림으로써 어지러운 시대에도 재야의 정신은 시퍼렇게 살아 있음을 증거 했던 것이다.

비판적 지식인으로서의 길, 그것은 외롭고도 지난한 ‘처사’(處士)의 길이었다. 남명 스스로 후인들이 처사로 불러주기를 원하여 임종 시에도 제자들에게 관작을 내세우지 말고 처사로 호칭할 것을 당부했다. 훗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1607~89)은 남명을 일러 이렇게 말하였다.

“천길 절벽에 우뚝 서서 일월(日月)과 빛을 겨루는 기상은 지금까지도 사람들을 외경(畏敬)케 하여 완악한 벼슬아치들을 청렴하게 하고 나약한 선비들을 떨쳐 일어나게 한다.”

^^^^^^▲ 장영훈풍수강론에서^^^^^^
南冥이 명종에게 올린 ‘丹城疏’ 전문

“대비는 과부, 전하는 고아에 불과 합니다”

전하, 나랏일은 이미 잘못되었고 나라의 근본은 이미 없어졌으며, 하늘의 뜻도 이미 떠나버렸고, 민심도 이미 이반(離叛)되었습니다. 낮은 벼슬아치들은 아랫자리에서 히히덕거리며 술과 여색에만 빠져 있습니다.

높은 벼슬아치들은 윗자리에서 빈둥거리며 뇌물을 받아들여 재산 긁어모으기에만 여념이 없습니다. 오장육부가 썩어 뭉그러져 배가 아픈 것처럼 온 나라의 형세가 안으로 곪을 대로 곪았는데도 누구 하나 책임지려고 하지 않습니다.

내직(內職)의 벼슬아치들은 자기 당파를 심어 권세를 독차지하려 들기를 마치 온 연못 속을 용이 독차지하듯 합니다. 외직(外職 : 전국 각도, 각 고을의 관직)에 있는 벼슬아치들은 백성을 멋대로 벗겨 먹기를 마치 여우가 들판에서 날뛰는 것 같습니다.

대비(문정왕후)께서는 신실하고 뜻이 깊다고 하나 깊은 구중궁궐의 한 과부에 불과하고, 전하는 아직 어리니 다만 돌아가신 임금의 한 고아에 불과합니다.

백 가지 천 가지로 내리는 하늘의 재앙을 어떻게 감당하며 억만 갈래로 흩어진 민심을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평소 조정에서 뇌물을 받고 사람을 쓰기 때문에 재물은 쌓이지만 민심은 흩어졌던 것입니다. 그래서 결국 장수 가운데는 자격을 갖춘 사람이 없고 성에는 지킬 군졸이 없으므로 왜적이 무인지경으로 들어온 것입니다.

이 어찌 이상한 일이겠습니까. 이번 사변도 대마도 왜놈들이 몰래 결탁해 앞잡이가 되었으니, 만고에 씻지 못할 큰 치욕입니다. 전하께서는 영묘(靈妙)함을 떨치시지 못하고 그 머리를 재빨리 숙였습니다.

옛날 우리나라에 대해 신하로 복종하던 대마도 왜놈들을 대접하는 의례가 천자(天子)나라인 주(周)나라를 대하는 의례보다 더 융숭합니다. 세종대왕 때 대마도를 정벌하고 성종대왕 때 북쪽 오랑캐를 정벌하던 일과 비교할 때 오늘날의 사정은 어떻습니까. 모르겠습니다.

전하께서는 무슨 일에 종사하시는지요? 풍악이나 여색을 좋아하십니까, 활쏘기나 말 타기를 좋아하십니까. 군자를 좋아하십니까, 소인을 좋아하십니까. 전하께서 좋아하시는 것이 어디에 있느냐에 따라 나라의 존망이 달려 있습니다.

정치하는 것은 사람에게 달려 있습니다. 인재를 취해 쓸 때 전하께서 솔선수범하시고, 솔선수범하실 때 도(道)로써 몸을 닦으십시오. 임금께서 사람을 취해 쓸 때 솔선수범하신다면, 전하 가까이에서 모시는 신하들이 모두 사직을 지킬 만한 사람으로 가득 찰 것입니다.

그렇게 하지 않고 사람을 취해 쓸 때 눈으로써 한다면, 곁에서 모시는 몇 사람을 제외하고는 모두 전하를 속이거나 저버릴 무리로 찰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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