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조 25년 4월 13일 : 왜구(倭寇)가 침범해 왔다. 이보다 먼저 일본 적추(賊酋) 평수길(平秀吉)이 관백(關白)이 되어【당초에 수길이 매우 빈천하여 꼴[芻]을 베어 팔아 생활하였다. 전(前) 관백(關白)이 출행할 때 옷을 벗은 채 수레 앞에 누워 있었다. 부하들이 죽이려고 하자 관백이 제지하고 나서 소원을 물었다. 수길이 가난해서 도저히 살아갈 수 없다고 대답하자 관백은 그에게 변소지기를 시켰다. 수길이 어찌나 변소를 깨끗이 청소하는지 냄새가 나거나 티 하나가 없었다. 관백은 매우 기뻐하여 그에게 신을 삼게 하였는데 역시 정밀하게 신을 삼아 바쳤다. 하루는 관백이 금술잔을 깊은 우물 속에 빠뜨렸다. 수길은 큰 물동이 수백 개를 구하여 물을 담았다가 한꺼번에 우물에 쏟아부으니 우물이 뒤집히면서 금술잔이 수면에 떠오르자 재빨리 집어내어 바쳤다. 이 때문에 그는 총애를 받아 승직의 길이 열렸다. 이때 국내에 큰 도둑이 있었으나 관백은 이를 물리치기가 매우 어려웠는데, 수길이 토벌을 자청하였다. 수길이 우선 많은 군대를 모집해야 하므로 관백에게 붉은 우산을 빌려 줄 것을 청하니, 관백이 허락하면서 ‘싸움터에 도착해서 펼 것이며 도중에서는 절대로 펴지 말라.’고 당부하였다. 수길은 대궐문을 나서자마자 붉은 우산을 펴고 행군하니 백성들이 이를 바라보고 관백이 직접 행차한다고 여겨 엄청난 사람이 모였고 곧바로 큰 승리를 거두었다. 이때 관백이 시해당하였다는 말을 듣자 수길은 즉시 민간 복장으로 몰래 입성하여 관백을 시해한 자를 죽이고 스스로 관백이 되었다.】 여러 나라를 병탄하고 잔포가 날로 심했다. 그는 항상 중국이 조공(朝貢)을 허락하지 않은 것에 대해 앙심을 품고 일찍이 중 현소(玄蘇) 등을 파견하여 요동(遼東)을 침범하려 하니 길을 빌려 달라고 청했다. 우리 나라에서 대의(大義)로 매우 준엄하게 거절하자 적은 드디어 온 나라의 군사를 총동원하여 현소·평행장(平行長)·평청정(平淸正)·평의지(平義智) 등을 장수로 삼아 대대적으로 침입해왔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金海)·밀양(密陽)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적을 진주(晉州)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
“왜적이 전에는 가지고 있던 우마를 전부 팔아 버리더니 이달 20일부터는 진주(晉州)를 공격하려고 밤낮없이 군사들을 조련시키며 전일에 팔아 버린 우마를 도로 사들입니다. 부산(釜山)·동래(東萊)·서평(西平)·다대포(多大浦) 등지에는 지역을 구획하여 성을 쌓으려고 성터를 설계하는데 주위가 대략 50여 리는 됩니다. 동래창(東萊倉)의 곡식을 부산포(釜山浦)로 옮겨두고 일본 군량은 부산 앞바다의 아차도(阿次島)에 운반해 놓았다고 합니다.”
선조 24년 5월 1일 : 풍신수길이 정병 1백만 명을 훈련시키고 이들을 다섯 부대로 나누어 먼저 조선을 점거하고 곧바로 요동으로 쳐들어가 천하를 차지하고자 하는 큰 계책을 세웠는데, 이런 계책을 세운 것은 일본이 나라는 작은데 군사는 많아 내란을 막을 수 없을까 염려해서였다. 그들의 서계와 사신들이 와서 하는 말이 모두가 쳐들어가는 것을 인도해달라는 말이었는데 간혹 우리 나라에서 거절함으로 인하여 조공(朝貢)을 주청(奏請)해 달라는 한두 마디를 변환시켜 유인하는 것뿐이었으니, 이것이 어찌 믿을 만한 말이었겠는가. 대마도 사람들은 신하로서 우리 나라를 섬겨오면서 옷가지나 식량 따위를 조달해 왔는데 하루아침에 본토의 왜를 인도하여 쳐들어 오기에는 낯뜨거운 면이 있고, 또 뒷날에 우리 나라를 다시 섬길 수 없게 되면 온갖 이익을 놓치게 되겠기에 짐짓 분란을 풀어주고자 하는 것처럼 하여 뒷날에 해명할 여지를 마련하고자 한 것이다. 그 후에 주화론(主和論)이 미봉책에 그치어 분란이 일어나게 되자 온갖 허물이 한쪽 편의 논의로 돌아가게 되었는데 이는 모두가 분당(分黨)이 일을 그르친 것이다.
선조 29년 9월 1일 : 조사가 일본에 들어갔다. 관백이 사신의 관사를 성대하게 장식해 놓고 기다렸는데 하룻밤 사이에 큰 지진이 나서 집이 넘어진 까닭에 다른 집으로 바꿔서 맞이하였다.
풍신수길은 말씨와 태도가 거만하였고 다리에 종기가 났다고 속이고 절을 할 때 무릎도 꿇지 않았으나 접향(接享)과 방향(邦享) 등은 매우 정성껏 하였는데 갑자기 성내어 꾸짖기를 ‘내가 너희 조신(朝臣)과 두 왕자를 석방하여 돌려 보냈으니, 조선은 왕자를 사신으로 보내와서 사례함이 마땅하거늘 벼슬이 낮은 사신을 보냈으니 이는 나를 업신여긴 일이다. 나는 황상(皇上)의 은전(恩典)에 대해서는 매우 감격하지만 조선은 무력을 가해야 마땅하다.’ 하였다. 또 사람을 시켜 황신(黃愼) 등을 책망하기를 ‘조선은 네 가지 큰 죄를 지었다. 왕자가 방환(放還)된 뒤에 지금까지 와서 사례하지 않았고, 사신은 반드시 낮은 관원으로 구차히 충원하여 들여보냈으며, 너희는 작은 나라로서 전부터 나를 업신여겨 세공(歲貢)도 바치지 않았고 조빙(朝聘)도 이르지 않았다. 그리고 책사(冊使)가 도망쳐 돌아가게 한 일도 다 너희 나라 소행이다.’ 하면서, 국서(國書)와 국폐(國幣)까지 아울러 물리쳤다. 행장은 사사로이 황신 등을 접대했는데 교묘한 말씨로 겸손히 사례할 뿐이었다.
적선(賊船)이 바다를 덮어오니 부산 첨사(釜山僉使) 정발(鄭撥)은 마침 절영도(絶影島)에서 사냥을 하다가, 조공하러 오는 왜라 여기고 대비하지 않았는데 미처 진(鎭)에 돌아오기도 전에 적이 이미 성에 올랐다. 발(撥)은 난병(亂兵) 중에 전사했다. 이튿날 동래부(東萊府)가 함락되고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이 죽었으며, 그의 첩(妾)도 죽었다. 적은 드디어 두 갈래로 나누어 진격하여 김해(金海)·밀양(密陽) 등 부(府)를 함락하였는데 병사 이각(李珏)은 군사를 거느리고 먼저 달아났다. 2백 년 동안 전쟁을 모르고 지낸 백성들이라 각 군현(郡縣)들이 풍문만 듣고도 놀라 무너졌다. 오직 밀양 부사 박진(朴晉)과 우병사 김성일(金誠一)이 적을 진주(晉州)에서 맞아 싸웠다. 성일이 아장(牙將) 이종인(李宗仁)을 시켜 백마를 탄 적의 두목을 쏘아 죽이니 드디어 적이 조금 물러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