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湖南)에 온 적의 배가 어떤 〈 적의〉 배인지는 모르지만 1척도 잡지 못하였으니 나랏일을 알 만하다.
황 역관(黃譯官)을 보내지 않는 문제에 대해서는 단지 피하기만 하려고 이러쿵저러쿵 논의만 하다가 시기를 놓쳐버렸다. 내가 아무리 날마다 하교하여 천만 번 말해도 조금도 귀담아 듣지 않고 매번 ‘죽을 죄를 졌습니다.’라는 말로 책임을 때우려고만 하니 경들에게 기대하는 것이 어찌 이런 것이겠는가. 오늘의 나랏일이 비록 어찌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기는 하였지만 그렇다고 자식이 부모의 병이 위독한 것을 보고 이제는 더 이상 가망이 없다고 핑계대고 약을 쓰지 않는 것처럼 할 수 있겠는가. 서쪽과 남쪽에서 들어오는 보고는 다 근심스럽기 짝이 없는데 비변사에서는 조금도 놀라는 기색을 보이지 않으니, 어찌된 일인가. 경들의 뜻을 이해할 수가 없다. 이후로는 나의 뜻을 잘 받들어 더 빨리 처리하여 나 혼자만 위에서 걱정하지 않도록 하라.”
하였다.【이때에 크기가 산과 같고 배 위에 30여 개의 돛대를 세운 배 1척이 사도진(蛇渡津) 앞바다에 들어온 것을 첨사(僉使) 민정학(閔廷鶴)이 편전(片箭)으로 쏘았다. 적이 우리 나라 사람 8명을 사로잡아 가지고 일본에 당도하여 편전을 보이면서 말하기를 “조선의 작은 화살이 배를 거의 절반이나 뚫고 들어갔으니 활을 잘 쏜다고 할 만하다.”고 하였다. 아마 서양 배였을 것이다.】
“전일 평안도의 군사를 징발하여 남쪽으로 내려보내기를 계청하였을 때 내가 굳이 한 말이 있었다. 그런데 이제 장계를 보니 매우 우려된다. 우리 나라는 모든 일에 있어서 항상 예비책을 도모하지 않기 때문에 난리를 만나 어찌할 줄 모르고 허둥대는 꼴은 조금도 이상할 것이 없다. 서쪽 변방의 일에 대해서 각별히 조처하여 해빙기(解氷期)까지 군사를 보충시키고 장수도 더 뽑아보내는 등의 일을, 임진왜란 때 왜적은 염려할 것도 못된다고 하면서 순변사를 혁파하고 왜적을 근심하는 사람을 배척하던 것처럼 하지 말라. 대비책이 있으면 걱정이 없게 되니 변란은 상대를 소홀히 여기는데서 발생하는 것이다. 지금 남쪽 지방이 평정된 것은 참으로 경하할 만하다. 그런데 또 어찌 북로(北虜)로 하여금 날뛰게 할 수야 있겠는가. 하루아침에 저들이 쳐들어오는 변란이 발생한다면 우리 나라의 인재와 병력으로 과연 무찔러 소탕할 수 있겠는가. 이는 본사가 계획을 세워 조처하기에 달려 있는 것이니 비변사에 이르라.”
태종 6년 5월 10일 : 전라도 수군 만호(水軍萬戶) 첨파두(詹波豆)에게 장(杖) 60대를 때렸으니, 양곡을 운반할 때 안행량(安行梁)에 이르렀다가 왜적에게 약탈당하여 미곡을 잃은 죄를 다스린 것이다. 운반을 감독한 장사 감무(長沙監務) 고용주(高用舟)는 왜적을 방어하는 것이 그의 임무가 아니라 하여 특별히 용서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