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평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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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평양 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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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 속의 천도 이야기 1

우리 고대사에 있어 천도는 신라와 가야를 제외한 나머지 국가 들이 모두 여러 이유로 인하여 추진하였다.

여기에는 백제와 같이 끊임없는 외침에 의한 타의적인 천도가 있는가 하면, 정치적 사정과 연관하여 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뿐만 아니라 자신들의 세력을 과시하기 위해 정치적인 목적과 연관지어 천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우리 고대사 속에 나오는 천도는 과연 어떻게 전개되었을까?
고구려부터 살펴보기로 하자.

- 고구려의 천도 -

우리 역사상 최 강대국이었던 고구려의 건국 연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삼국사기에 기록된 최소한 BC 37년 이전일 것으로 보는 견해가 제기되고 있다.

압록강 중 상류지대에서 흥기한 고구려는 점점 융성하여 만주 일대와 한반도를 아우르는 대제국을 건설하여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였다.

흔히 고구려의 천도하면 장수왕의 평양 천도만 알고 있을 지도 모르겠다. 평양 천도가 고구려의 발전에 있어 중대한 사건의 하나로 인식되다 보니 그렇게 여길지도 모른다. 그러나 고구려는 여러 차례 천도를 단행하였다.

처음에 고추모 (주몽이라 부르는 고구려의 건국 시조로 동명왕)가 건국하여 정착한 곳은 졸본성이었다. 그러다가 2대 유리왕이 즉위한 지 22년째 되던 해인 서기 3년에 국내성, 즉 환도성으로 도읍을 옮긴다.

하지만 여기에 대해서도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한국과 중국 학자들은 삼국사기의 기록을 토대로 서기 3년에 고구려가 졸본에서 국내 (환도) 로 천도했다는 주장에 모두 공감하고 있으나 정작 중국 고대 사서인 삼국지에는 그렇게 기록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조위의 관구검이 침략했을 당시의 고구려 수도가 졸본이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더구나 삼국사기 고구려본기 산상왕조 기록에도 유리왕대의 천도기사와 비슷한 내용이 실려 있어 이를 두고 일본측 학자들은 유리왕대 보다도 후대인 산상왕대에 이르러 천도했을 것으로 보고 있다.

천도의 시기와 명칭을 놓고 한, 중, 일 세 학자들간의 의견이 엇갈리고 있으나 고구려가 초기에 졸본에서 정착하였다가 국내, 즉 환도로 도읍을 옮긴 것만큼은 분명해 보인다.

장수왕의 평양 천도까지 고구려는 긴 천도는 아니지만 임시 천도를 자주 단행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즉, 산상왕 13년인 209년의 환도성 이전라든가, 동천왕 21년인 서기 247년의 평양성 이전, 그리고 고국원왕 12년인 342년의 환도성 이거, 다시 고국원왕 13년인 343년의 평양 동황성 이거등 당시의 국내 상황에 따라 임시로 옮겨 다녔음을 알 수 있다.

이처럼 고구려의 잦은 천도는 동천왕 21년인 서기 247년의 조위 (위나라) 관구검의 침입을 받은 불가피한 상황에서 나온 것도 있지만, 대체로 권력층 내부의 불안정한 모습에서 기인되었다는 점도 배제할 수 없다.

초기의 불안정한 정치적인 상황을 극복하고 국력의 성장과 발전을 도모하던 고구려는 5세기 광개토왕 - 장수왕대에 이르는 시기에 이르면 동북아 최강자로 군림하게 된다. 특히, 장수왕대에 이르면 그 영역이 한반도 중부지방 깊숙한 곳까지 위치했을 만큼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게 된다.

장수왕 15년인 서기 427년에 단행된 평양천도는 고구려 역사에 있어 중요한 의미를 지닌 사건이다. 지금까지 알려진 바와 같이 고구려의 평양천도는 북방진출 보다는 남진을 목적으로 하였다는 점이나, 북위의 위협으로 부터 안정적인 국가발전을 모색하기 위해 단행했다는 이유로 이해해 왔다.

하지만 고구려 내부의 사정을 접하면 그 이유는 잘못된 것임을 이해하게 된다. 장수왕 당시 고구려는 건국한지 이미 450여년이 지난 오랜 나라였고, 졸본에서 천도해 온 국내성, 즉 환도성은 고구려의 오랜 중심지 역할을 하며 토착 귀족 세력의 기반이 되어 버렸다.

광개토왕 대를 거치면서 왕권이 크게 강화되자, 왕실에서는 왕권의 지속적인 강화를 물색하기 위해 토착 귀족 세력의 중심지이던 국내성을 떠나기로 결심하게 되었고 그 결심의 결과가 바로 평양천도 였던 것이다.

과거 외부적인 요인 (외침 등에 의한)에 의한 일시적인 성격의 천도가 주류를 이루었었으나, 장수왕대의 평양 천도는 오히려 자의적인 선택에 의해 이루어진 자의성이 짙은 천도라 해도 지나친 말은 아닐 것이다. 이 자의적 선택에 의한 천도는 과거의 사례와는 근본적으로 다를 뿐만 아니라 고구려 천도의 중요한 특징으로 대변되고 있다.

또한 평양 천도 이후 기존의 국내성 지역과 다른 평양지역을 토대로 둔 새로운 귀족 세력의 등장은 바로 이런 점들을 보여주고 있는 중요한 근거로 생각된다. 따라서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남진 정책의 연장이나 북방세력의 위협 이 아니라 바로 전제왕권을 강화하여 구 귀족들을 견제하려는 목적에 있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고구려의 평양 천도에는 경제적인 요인도 작용되었다. 즉, 기존의 국내성 지역은 중국측 사서의 표현대로 산은 넓고 넓은 밭이 없어 식량생산이 수월한 곳이 아닌 산악지형으로 경제적 활동이 위축될 수 밖에 없었던 불리한 여건을 가지고 있었다.

게다가 생산력과 수취기반의 한계는 더욱 많은 물자조달을 필요로 하게 되었고 이런 상황에서 국내성은 그런 조건을 충족시키지 못했기 때문에 평양으로의 천도를 단행한 것이 아닌가 보여진다.

또한 교역면에 있어서 단순한 산악 지형에 둘러 쌓인 국내성으로는 역시 한계에 다다를 수 밖에 없었기에 평양은 이러한 교역이나 물자 수송에 잇점을 지닌 곳 (해상 교역이나 물자 수송이 용이한 바다로 나갈 수 있는 청천강 및 대동강 이 인접해 있었기 때문) 으로 고구려의 수도가 되기에 손색이 없는 곳이었다는 판단도 작용했을 것으로 보인다.

이처럼 고구려의 초기의 천도는 불안정한 정정에 외부적인 요인까지 가미되어 어려움을 겪은 것이 사실이었으나 장수왕의 평양 천도는 정치, 경제적인 난점과 한계에 달한 국내성의 문제를 새로운 거점 도시로서 극복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한 외부적인 요인에 의한 천도를 극복하고 자의적인 천도를 단행했다는 점 또한 고구려 천도의 중요한 특징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 글을 시작하며 -

최근 행정수도 이전 논란이 야기되면서 정치권을 포함한 지도층 일각에서 천도인지 아니면 단순한 이전인지를 놓고 치열한 견해가 오가고 있다. 왜? 도대체 무엇 때문에 이런 논란이 오고가는 것일까?

천도란 무엇인가? 한자를 풀어보면 옮길 천(遷)에 도읍 도(都) 자가 된다. 말 그대로를 풀어 본다면 그나라의 중심지를 옮긴다는 뜻이다.

한 나라의 중심지인 수도를 옮긴다는 것은 그 나라에 있어 매우 중대한 사안이다. 각종 도시 시설들을 입안하고 세우는 것만으로 막대한 돈이 들어간다. 거기에다 많은 돈이 들어가는 만큼이나 엄청난 국력도 소모된다.

국민들의 돈이 들어가는 막대한 일이기에 잘 옮기면 다행이요, 못 옮기면 실패라는 평가를 후세에 까지 짊어지게 되는 것이 바로 천도 이다. 어찌보면 오늘날 행정수도 이전을 두고 말들이 많은 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이처럼 논란이 끊이지 않고 계속되는 가운데 역사 속에서의 천도는 어떻게 이루어 졌을까?

필자는 최근 논란이 야기되고 있는 행정수도 이전 논란을 지켜보면서 역사속의 천도는 어떻게 이루어졌고, 어떤 목적이 짙게 깔려 있는 지 그 궁금함을 풀어 보고자 한다.

이번 연재를 계기로 역사 속의 천도가 가져다 주는 목적이나 의미는 어디에 있으며 오늘날 논란과는 어떤 관련이 있는 지 살펴보는 것도 역사에 대해 관심이 있는 분들이라면 흥미롭게 생각하실 것이다.

비록 부족한 글이니마 천도에 대한 이해에 조금이나마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램과 함께 앞으로 진지하게 천도가 갖는 의미는 무엇인지 필자 나름대로도 곰곰히 생각해 보며 정리해 보고자 한다. 많은 질정을 바라마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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