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탐방] 1967년 대한민국 역사에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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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탐방] 1967년 대한민국 역사에는-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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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백림 거점 북괴 지하 공작단 사건

^^^▲ 동백림 공작단사건 공판모습
ⓒ 검찰청 사이버홍보관^^^
1967년 7월 5일 중앙정보부가 동백림을 거점으로 한 북괴 지하 공작단 사건의 전모와 그동안의 수사상황을 발표하자 국민은 경악을 금치 못했다.

이 발표에 따르면 이 공작단은 동백림을 포함, 서구라파 일대에서 암약해 오면서 국내에까지 국제적 공작망을 침투시키고 있던 대규모 공산주의 조직으로서 15명의 교수를 비롯하여 의사, 예술인, 언론인, 공무원 등 서독에 유학한 지식인이 주동이 되어 있었다는 사실이다.

이들은 1958년 9월부터 1967년 5월까지 동독 주재 대사관을 왕래하면서 간첩활동을 해왔고 북괴로부터 20여 차례에 걸쳐 10여만달러의 공작금을 받아 북괴가 주장하는 남북협상을 통안 평화적 통일방안의 선전과 사회주의 혁명(무력을 통한 적화통일) 분위기를 조성, 우리나라의 질서를파괴하여 소위 그들이 말하는 결정적 시기에 국내의 공산주의자들을 내세워 선량한 국민들을 선동, 무장 봉기를 꾀한다는 허무맹랑한 목적을 위해 암약해 오던 중 우리 정보망에 걸려 일망타진 된 것이다.

북괴는 휴전선을 넘거나 일본을 통해 합법적인 입국을 가장하거나 해안 루트를 통해서 간첩들을 남파시켜 왔었다. 그러나 이 사건은 우리가 예측한 과거의 경로를 밟지 않고 구라파를 통한 합법적인 절차를 밟게 하여 침투시키기도 한다는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서독 유학생, 여행자 포섭 대상

이 사건에 관련되어 검거된 공작원들은 주로 서구라파 유학생들과 그 지역 여행자들로서 이들은 북괴공작원들에게 포섭되어 철없는 행동을 했던 사람들이 대부분이었다. 이들이 선량한 한국의 유학생과 여행자를 포섭한 방법은 너무나 달콤했다.

이들 공작원들은 동백림을 포함한 동구권 공산 진영의 관광을 시켜주겠다고 여행자들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켜 포섭했는가 하면, 유학생들에게는 경제적 약점을 이용, 생활비를 대주면서 접근하기도 했고, 재북 가족의 소식을 알려 준다고 접근하는 등 물불을 가리지 않고 온갖 감언이설로 수단과 방법을 총동원, 붉은 마수의 손길을 뻗쳐 왔던 것이다.

이와 같은 끈질긴 공작원들의 공세에 선량했던 유학생들과 여행자들은 정신적 동요를 일으켰던 것이다. 따라서 북괴공작원들로부터 물질적으로 도움을 받았던 이들은 사상적 동요를 일으켜 마침내 그들의 노예가 되고 만 것이다.

북괴에서 파견된 공작단들에게 포섭된 유학생 및 여행자들은 동독주재 북괴대사를 만났고, 노동당 연락부 구라파 총책을 만났으며, 기타의 공작원들을 만나 그들로부터 우대를 받아가며 자본주의 체제보다 공산주의 체제가 우수하다는 등의 사상교육을 받았고, 또 그들로부터 북괴의 발전상을 듣는 등 교육을 받았던 것이다.

민족주의 비교 연구회 조직

이렇게 하여 유학생 및 여행자들은 완전히 공산주의자로 둔갑, 동백림과 평양을 왕래하며 적화통일을 위한 지령을 받고 암약하기에 이르렀던 것이다. 이들 간첩들은 민족주의 비교연구회라는 붉은 서클을 조직하여 이를 통해 불온사상과 북괴의 지령을 수행했고 미군철수, 연립정부를 구성해야 한다는 등 북괴의 주장을 암암리에 선전했으며, 심지어는 북괴 동조 사상을 은근히 국민과 학생들에게 주입시키려고 혈안이 되어 한국의 기밀을 탐지하여 북괴에 정보를 제공했고, 조직공작을 펴 대남공작을 일삼았던 것이다.

이 사건에 관련된 인원이 194명에 이르고 있어 실로 경악을 금할 수가 없다. 북괴가 겉으로는 남북협상을 통한 평화통일을 주장하면서 안으로는 국토를 요새화하는 등 전쟁준비에 광분하고 있는데 그들의 감언이설에 속은 천진한 이들이 이처럼 일시에 그들의 주구가 되었다는 사실에서 우리 국민의 철저한 반공의식을 다시 한번 정립해야겠다는 움직임이 이 사건을 계기로 대두되었다.

이 사건은 북괴가 허위 선전, 무장간첩 남파만을 하지않고 다음 세대에 목표를 두고 광범위하고 장기적인 안목으로 그들 공산주의 사상을 주입시키려 한다는 사실이 폭로되어 우리 국민들에게 큰 놀라움을 주었다.

이 사건 수사를 끝낸 중앙정보부는 66명을 검찰에 넘겼는데 검찰은 34명을 기소, 67년 12월 13일 선고 공판이 있었는데 두 명의 피고에는 사형, 윤이상 등 4명의 피고에게는 무기, 그밖의 피고에게는 징역 15년에서 1년까지, 전 피고에게 실형이 선고되었다. 윤이상 피고는 복역 중 형집행 정지처분이 내려져 출감했는데 그는 현재 서독에서 음악 활동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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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경구 2008-02-24 14:15:33
윤이상 이라는 자는 죽은자(고태골로 간것으로 암)로 아는데요?
사실 윤이상 이라는 자는 대한민국 법정에 세워서 피아니스트
백건우 부인 윤정희 를 북괴에 넘겨 주려다가 실패 한 사건을
다시 조사하여 사법처리를 해야 된다고 봅니다.

그러한 골수 종북 주의자를 미화하고 무슨 기념관 인지 하여간---
박정희 기념관은 지지 부진 하면서 공산주의자의 기념관 이라니
세상에 이런 일은 있을수가 없는 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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