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빈한 타협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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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빈한 타협주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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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역, 중용, 심학, 이 셋은 일체이다

무릇 산 것은 부드럽고, 죽으면 딱딱하다. 그래서 노자께서 말씀하셨다. 굳고 딱딱한 사람은 죽은 무리이며, 부드럽고 약한 사람은 산 무리이다.
(凡物生則柔 死則剛 故老子曰 堅剛者死之徒 柔弱者生之徒)

- 이수광의 “지봉유설” 사망(死亡, 권17 인사부) 중에서 -

오늘의 시점에서 돌이켜보면, 지봉유설은 그 내용이 그리 대단하다고 볼 수 없을 것 같다. 아이템 설정부터 중국의 문물을 의식했고, 그 풀이도 중국 먼저 조선 다음의 순으로 진행하고 있다. 또 지봉은 성리학자로서 칙칙하게 역(易)과 주자(朱子)를 중시하고 있다. 그뿐인가, 우리의 역사와 지리에서 성가신 문제인 기자(箕子)와 곤륜(崑崙)이 물 혹처럼 여전히 따라다닌다.

지봉 이수광에 대한 참된 평가는 그의 청빈한 용기에서 비롯된다. 당시 조선은 중국과 주종(主從)의 수직관계에 잡혀있었다. 이것은 목숨으로 통하는 군신(君臣)과 부자(父子)의 충효와 다를 바 없다. 그런데 지봉은 유설을 통하여 중국과 조선을 나란히 놓고 수평관계로 풀어나간다. 이곳저곳 틈틈이 깔아놓지만, 한 예를 들면, 저들의 동해가 우리의 서해이다 하는 식이다.

주역(周易)은 동아시아 유교권의 정신적 뿌리이다. 유가(儒家)에서 도가(道家)의 무(無)나 불가(佛家)의 공(空)에 대하여 열등감에 빠지지 않는 것은 바로 역경이 베풀어주는 현(玄)이 있기 때문이다. 주역은 선비의 정체의식을 받쳐준다. 불세출의 천재 매월당 김시습과 율곡 이이가 십대에 모친을 여의자 승복까지 입지만, 한때의 산림은둔으로 인정되는 것과 맥락이 같다.

지봉유설은 천문부(권1)로 첫 장을 연다. 여기에 혼돈(카오스)에서 시작하여 만물(코스모스)이 생성되는 과정을 기록하고 있는데, 이것의 원전은 물론 64괘로 구성된 주역이다. 64괘 각각은 상괘와 하괘 두 겹이며, 상하는 세 쌍의 효(爻)로 조직된다. 효는 음양 두 가지로써 1비트이다. 도합 6효는 하괘 밑에서 상괘 위까지 각각 1효, 2효, 3효, 4효, 5효, 6효라고 부른다.

해설은 먼저 상괘와 하괘를 따로 잡고, 이어 상하 괘의 조화를 본다. 다음은 순서에 따라 6효마다 따로 푸는데, 그 원리는 위치에 따라 서로 다르다.
1. 정(正)과 중(中) - (정)홀은 양, 짝은 음. (중)하괘 2효와 상괘 5효
2. 응(應)과 비(比) - (응)14, 25, 36 쌍효의 음양. (비)이웃끼리 음양
3. 귀천(貴賤) - 1(庶民), 2(士), 3(大夫), 4(公卿), 5(君主), 6(尊貴)

쉽게 바뀌고 새로워진다, 역(易)의 원뜻이다. 경(經)은 씨줄로서 하늘의 말씀이다. 위는 날줄로서 땅에 망(network)을 짠다. 역경은 통상 주역(周易)이며, 역위는 주역 주변의 공간이다. 또, 참(讖)은 조짐으로 주역에 시간을 준다. 하늘은 숫자로 나타내고(象成數生), 상수(象數)는 하늘에 감춰진 땅의 암호(code)가 된다. 풍수(風水)와 명리(命理)는 이런 코드로 풀어간다.

야, 숨 가쁘다. 위 문단을 좀더 쉽고 길게 설명하면 뭐가 덧나? 아니다, 길면 긴대로 읽는 동안 다른 잡생각이 낄 수도 있다. 글은 어차피 첫 자부터 끝 자까지 읽어야하니까, 그 사이에는 시간 간격이 발생한다. 그래서 무엇을 설명하려면, 한눈에 척 들어오는 표나 그림으로 보여주는 것이 좋다. 위에서 간단하게 정리한 역의 개념은 문장으로 도식화 효과를 노린 것이다.

주역은 천지인(天地人)의 대응원리와 역사의 변천과정을 담고 있어서 예지(叡智)의 능력이 있다. 점서(占筮)는 동등한 방향 중 하나만 선택할 때 유용하다. 이때 점의 적중 확률은 자연의 우발성이 뒷받침한다. 동전을 던져 선택하는 것과 결과는 다를 바 없다. 다만 역경에 의거하면, 하늘의 말씀이 새롭게 바뀐 생각을 도와준다. 이것은 하늘과 나와의 협상타결인 것이다.

타협, 지봉이 주역에서 얻었던 지혜였다고 졸자는 감히 추측해 본다. 주역의 요체는 음양의 조화이다. 양극의 조화가 무엇을 뜻하는가? 상생하는 길이다. 혼자서 결정하는 일이라면 점이든 제비뽑든 아무래도 좋다. 모임에서 회장을 뽑는 선거라면 다수결로 결정하면 된다. 그러나 국가수준급 다원화 사회에서의 갈등은 서로의 처지를 이해하고 주고받는 것이 바른 길이다.

타협은 양단 사이의 어설픈 야합이 아니라 제3의 다른 길이다. 이것은 더하지도 덜하지도 않는 중용(中庸)이다. 마음을 거울처럼 닦아놓은 상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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