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절은 바야흐로 1981년 봄이라, 내가 불일암서 법정스님을 하직하고 나올 제 스님은 내게 송광사에 가거든 며칠 쉬면서 시간을 내서 현오스님을 만나보라 하셨다. 그리하여 불일암에서 송광사로 내려오는 산길을 터덜터덜 내려올 제 눈앞에 펼쳐지는 신평마을의 풍경이 참으로 고즈녘하였다.
송광사 일주문을 들어서 洗月閣(세월각)이란 건물 옆에 이르니, 할머니들 20~30여 명 가량이 모여서 두 귀를 쫑긋 세우고 한 스님의 일장연설을 듣고 있었다. 스님의 행색은 초라했다. 말 그대로 누덕누덕 기운 납의(衲衣)를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스님은 홀로 돛달고 홀로 노 저어가며 지국총 지국총 이야기의 바다를 홀로 저어갈 뿐이었다.
높이 약 15m가량 되어 보이는 이파리도 달리지 않고 가지도 뻗어있지 않은 밋밋한 기둥. 살아있는 나무도 아니고 그렇다고 썩은 기둥도 아닌 정체불명의 고향수(古香樹)라는 물건이 오늘 이야기의 중심이었다.
송광사를 중창한 보조국사는 입적하기 자신이 짚고 다니던 지팡이를 땅에 심으며 이같이 설레발을 친다.
"향나무야, 향나무야. 너와 나는 생사고락을 같이하자꾸나. 내가 죽으면 너 또한 숨죽였다가 내가 이 도량에 다시 오거든 너도 다시 새잎을 피워 나랑 같이 살자꾸나"
지눌이 입적하자 나무도 곧 시들어 갔고 그 후로 800년 가차이 이 고향수는 죽은 듯이 서 있다는 것이다. 마침내 얼굴이 참외같이 노랗고 주름이 수세미같이 쭈글쭈글한 스님은 마음의 주장자를 높이 들어 "할"을 외치시는 거다.
"괘씸타, 고향수야! 네가 죽었으면 정녕 썩어 문드러져야 도리 옳고 아니 죽었으면 잎을 무성히 피워 무더운 여름날 지나는 길손의 땀을 씻어주는 그늘이 되든지 해야 이치에 맞거늘 죽은 것도 산 것도 아닌 헛것이 감히 사람을 우롱하다니!"
이 싸가지 어림 반 푼어치 없는 놈의 향나무야, 오지도 않을 보조국사 지눌일랑 혀 빠지게 기다리지 말고 차라리 눈보라 휘몰아치는 엄동설한에 과부방 구들장이나 데우는 땔감이 되는 것이 어떠한고?"
스님에 따르면 송광사를 방문한 노산 이은상이 스님과 이 고향수 앞에서 누가 시조를 더 멋지게 짓나 내기를 했다 한다. 먼저 노산 이은상이 운을 뗐다.
어디메 계시나요 언제 오시나요
말세 창생을 뉘 있어 건지리까
기다려 애타는 마음 임도 하마 아시리.
이번엔 인암스님이 화창했다.
살아서 푸른 잎도 떨어지는 가을인데
마른 나무 앞에 산 잎 찾는 이 마음
아신 듯 모르시오니 못내 야속합니다.
내가 보기에 이 시조 경연은 초등학교도 나오지 못한 인암 스님의 되치기 한판승이 분명해 보인다. 노산의 시조가 채 만져지지 않는 관념의 허공을 걸려 있다면 인암 스님의 시조는 두 발을 땅에 딛고 사는 자의 진솔함이 있다할 것이다. 한 가지 안타까운 일은 내 짧은 재주로는 언감생심 인암 스님의 맛깔스런 이야기 버전(version)을 도저히 흉내조차 낼 수 없다는 점이다.
우리 음악에는 시김새라는 게 있다. 악보의 음표에 얽매이지 않고 자기 감정과 느낌에 따라 음표와 음표 사이에 꾸밈음을 집어넣어 노래를 물 흐르듯 멋스럽게 부르는 기법을 말한다. 이 시김새는 사람 마다 다른데 잘 익어 곰삭은 소리를 일러 시김새가 좋다고 한다. 그러니까 내가 제아무리 맨발 벗고 뛰어봤자 스님의 이야기 시김새를 따라갈 수는 없다는 말이다.
스님은 그렇게 할머니들의 마음을 쥐락펴락 땅겼다 느꿨다가 그야말로 자유자재였다.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할머니들은 가가대소를 터뜨리며 스님의 앞으로 모여들었다. 그리하여 저마다 고쟁이 속 주머니를 뒤져 스님의 허리춤에다 1,000원 짜리 지전을 찔러주는가 하면 사탕을 준다 떡을 준다 이런 야단법석이 없었다. 그것은 영락없이 한국 불교 최초의 '원조 오빠부대'였으며 '팬클럽'이었다.
아아, 바로 몇 걸음 안 떨어진 불일암에서는 '무소유'를 외치는 법정스님의 외침이 그토록 청청하건만 바로 그 턱밑 송광사에서 백주 대낮에 너무나 공공연히 '유소유'의 풍경이 벌어지고 있다니 ... 난 그저 어안이 벙벙할 따름이었다.
'유소유'를 실천(?)하시는 스님의 법명은 인암스님이셨다.
그분은 자기는 아주 어린 나이에 동자승으로 송광사에 들어와서 50여 년을 전란에 불타버린 가람의 중창 불사를 위해 몸을 함부로 다루다 보니 늙고 병들어 곤고하기 짝이 없다고 했다. 자신의 곤한 처지마저 어찌나 칼로리 있고 감칠 맛나게 하던지 그분의 이야기를 듣는 사람이면 누구나 '뿅'가게 마련이었다.
내가 보기에 할머니들에게 있어 인암 스님은 더 이상 '수도승'아니었다. 그저 그들과 똑같이 늙고 병들고 힘없는 노인에 지나지 않았다. 할머니들의 심정은 예서 더 나아가 스님과 자신들을 동일시하는 데에 까지 이르렀으니 이것은 바로 스님에 대한 연민인 동시에 자신에 대한 연민이기도 했다. 어느새 나마저 가슴이 뭉클해지고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나무 인암스님, 부디 당신의 '유소유'를 줄기차게 실천하시기를, 그리고 그돈 모아놨다가 이담에 보조국사 지눌을 만나거든 걸판지게 한잔 하시구려!
고향수를 지나 우화각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도록 스님의 꽉 차 있어 답답한 주머니 속을 삐칠비칠삐져나와 서로 먼저 바깥바람을 쏘이려는 이야기들의 눈물겨운 몸싸움은 끊일 줄 몰랐으니 이윽고 국사전 앞에 이르러서야 드디어 이야기 하나가 세상구경을 하기에 이른다.
그 곳엔 용도불명의 속이 움푹 파인 통나무 통이 있었으니 이름하여 '비싸리구시'였다.
"요 물건이 도대체 무엇이냐? 어떤 여고생들은 이 통을 보고 아이고 중들이 여그서 꾀 벗고 목간허던 목간통인가 보다 호호호 웃고 할머니들은 아따, 중들이 얼마나 밥을 많이 먹기에 요렇게 밥통이 크다냐? 히히히 웃는디 요 물건이 어디 쓰는 물건이냐면 초 파일날 사부대중 먹일 밥 퍼담어 놓는 통이여.
이 나무를 오대산에서 궁궐 기둥으로 쓸려고 벨 적에 꿈쩍하지를 안해. 야,이눔아. 임금님 계신 궁궐 기둥으로 쓸라는디 함 움직여봐. 그래도 소용없어. 지리산, 화엄사, 속리산, 법주사....왼갖 절 이름을 불러도 꿈쩍 않하거든. 그래서 마지막으로 송광사 절 기둥으로 쓸란다고 허니까 움직이더란 것이여."
스님은 이 나무가 싸리나무라는 것이었지만 나로선 도무지 이해가 되질 않는 얘기였다. 얼핏 보아도 지름이 2m 이상 되는 듯 하고 쌀 7가마 분량의 밥을 저장할 수 있다는 이 나무가 싸리나무라니! 내가 아는 싸리나무의 굵기는 겨우 2~3cm에 불과할 뿐이다. 사실이 이럴진대, 사찰이나 궁궐의 기둥이 싸리나무로 만들어졌다는 속설은 곳곳에 넘쳐난다. 그렇다면 이걸 어찌 해석해야만 옳을 것인가.
이 나무는 실제로는 '괴목'이라 불리는 느티나무라고 한다. 느티나무는 아름다운 무늬와 단단하고 잘 썩지 않으면서도 가공하기 쉬운 나무라는 이유로 조상들이 애용했다. 그렇다면 어쩌다 느티나무가 싸리나무로 잘못 알려졌을까? 처음에 사리함을 만드는데 쓰였던 느티나무를 사리(舍利)나무로 부르다가 발음이 비슷한 싸리나무로 전이되지 않았을까 추측할 뿐이다.
하여간에 인암 스님의 입가에선 그물에 걸린 고기 신세가 되어버린 언어들이 파닥거렸다. 이 비싸리구시 이야기가 끝나자마자 또 다른 '할머니 부대'들이 '스님 오빠'의 허리춤에다 때에 절은 1,000원 짜리를 찔러준다. 스님의 재테크가, 그 밉지않은 '유소유'가 보는 이의 가슴을 찡하게 했다.
마지막으로 당도한 것은 대웅전 앞에 있는 한 그루의 나무였다. 스님은 그 나무를 '간지럼 타는 나무'라 했다. 실제로 그 나무는 이파리 하나를 건드리자 점점 크게 일렁이더니 나중에는 나무 전체가 부르르 떨었다.
스님은 이 나무의 진짜 수종을 알지 못했으며 나무 이름을 알려고 덤비는 할머니도 없었다. 현상보다는 본질이 중요한 법이라는 걸 깨우친 노보살들이었다. 아니, 그냥 스님의 이야기가 좋았으리라.
세간에서 배롱나무를 간지럼타는 나무로 부르기도 하나 내가 보기에 그 나무는 분명 배롱나무는 아니었다. 나무에 대한 나의 내공이 전보단 깊어졌으므로 혹 지금 가면 수종을 알 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다만 하나의 이파리가 다른 이파리에게 미치는 영향에 대하여 잠시 묵상했을 뿐이었다. 공동체_그 함께 무너짐에 대하여 혹은 동병상련에 대하여.
"모든 중생이 병에 걸려 있으므로 나도 병들었습니다."_불설 유마힐 소설경에 나오는 말이다.
그날 내가 본 '할머니 부대'들은 어쩌면 유마힐들의 현신이었을까, 아니면 유마힐 거사가 보내서 온 보살들이었을까. 세월이 20여 년도 더 지나버렸지만 그때의 일은 아직도 잊혀지지 않는 장면이다.
인암 스님은 그 후로 광주문화방송 등 로컬 프로에도 몇 번 출연하시기도 하다가 송광사 주지를 역임하시고 90년대 초 입적하신걸로 안다. 극락에서 벌써 보조국사 지눌을 만났을 인암 스님은 무료한 시간이면 송광사의 봄날을 그리워하리라.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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