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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대 일제가 펴낸 조선고적도보에 실린 창덕궁 일곽의 배치도현재 상당수의 전각들이 철거되고 없다. (분홍색 표시는 현재 남아있는 건물) | ||
조선 14대 선조 25년이던 1592년 4월, 14만 대군으로 일본군은 우리나라에 쳐들어왔는데, 소위 왜란이라 불리우는 7년전쟁의 시작이었습니다.
나라 안팎의 어려움이 잇다르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나라 안의 어려움을 밖으로 돌리기 위해 대규모 군대를 파견하여 쳐들어 오게 되는데, 침략군은 파죽지세로 북상하여 급기야 수도인 한성을 함락시키게 됩니다.
임금 선조는 일본군을 막기 위해 당대 제일의 명장이라는 신립을 탄금대에서 막도록 내 보냈지만, 조선은 극심한 문치주의에 빠져 이렇다 할 방어력을 키우지 못한 한계를 드러내며 패퇴하고 말았습니다.
결국 4월 30일 (음), 선조는 한성을 떠나 북으로 몽진(임금이 전란등을 피해 피난하는 일)길에 올랐는데, 왜란으로 한성을 떠날 때 까지 선조는 줄곧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을 오가면서 나랏일을 보았습니다.
그러나 임진왜란 한 해전인 1591년, 승려 겐소(玄蘇) 등 일본측 사절을 접견한 곳이 창덕궁 이었고. 공교롭게도 그 이듬해 침략한 일본군을 피하기 위해 길을 나선 것 역시 창덕궁이었으니, 이 무슨 아이러니한 일인지 모르겠습니다.
어쨌든 일본군의 침입으로 경복궁과 창덕궁, 창경궁 세 궁은 침입한 일본군에 의해 처참히 불에 타고 남아있는 곳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습니다. 심지어 왕실의 사당인 종묘 조차도 불에 타 버리고 없었으니까요..
결국 7년동안 계속된 전쟁은 끝났지만, 그 전쟁으로 인한 피해는 너무도 컸습니다. 궁궐 역시 마찬가지였습니다. 전란후 제일먼저 경복궁을 중건해야 한다는 의견이 있었던 것이 사실이었습니다만, 당시 조정의 여론은 그러하지 못했는데요. 당시의 논의는
경복궁은 풍수지리상 불길한 곳이고 궁궐 규모도 제법 큰 까닭에 막대한 나라의 돈이 들어가므로 여러 가지로 복구가 힘들다
는 것이었습니다.
결국 1607년인 선조 40년 궁궐의 재건은 법궁이자 정궁인 경복궁이 아닌 이궁인 창덕궁부터 시작되었습니다. 1612년인 광해군 3년에 마무리 되어 정릉동 행궁 (임진왜란 이후선조의 임시 행궁)에 머물러 있던 광해군이 창덕궁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이후 1867년이던 고종 4년에 경복궁이 중건될 때 까지 창덕궁은 무려 273 년여 동안 불타없어진 경복궁을 대신하여 조선후기의 법궁이자 정궁 역할을 담당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렇게 창덕궁이 복구되었어도 그렇게 평탄하게 보존되지는 못했던 것 같습니다.
광해군때 재건된지 불과 12년 만인 1623년의 인조반정때 광해군을 잡는다는 구실로 반정군들이 들고 다닌 횃불이 실수로 떨어지면서 이로 인한 화재로 인해 인정전을 제외한 모든 전각이 불에 타 버리는 비운을 맞았으며, 1624년 초에 일어난 이괄의 난때도 창경궁과 더불어 또 다시 일부 전각들이 불에 타는 등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온전하게 보전되지 못했던 상황에서도 인조는 창덕궁 내에 대대적인 후원을 조성하는 데 현재 비공개 지역인 옥류천 일원의 여러 정자들은 바로 인조때 지어진 것이며, 대체로 1636년이던 인조 14년의 청나라 침입 직후의 일이었습니다. 또한 화재로 불에 탄 창덕궁들의 주요 건물들도 인조 20년이후로 모두 중건 되었습니다.
이후 창덕궁에는 1656년인 효종 7년에 만수전, 춘휘당 등이 지어졌고 숙종때 만수전은 선원전으로 고쳐지면서 임금의 초상화를 모시는 진전으로 바뀌게 되었습니다. 이밖에 궁궐내 서북쪽 끝에 임진왜란때 우리를 도와준 명나라의 은혜에 감사한다는 명분하에 제단을 세우게 되는데, 이것이 대보단으로 1900년대 이후 철거되고 지금은 남아 있지 않습니다.
21대 영조 20년이던 1745년, 창덕궁내에 있던 승정원 (임금의 명을 받드는 관청, 오늘날의 대통령 비서실과 비슷)에서 불이 나는 바람에 창덕궁 건물 일부가 불에 탔으나 곧 중건되었으며, 22대 정조 즉위년인 1776년에는 세종의 집현전과 더불어 조선 최고의 학문 연구 기관으로 알려진 규장각 건물이 후원에 들어서게 됩니다. 이 건물은 현재 주합루라 불리우며 1층은 규장각 서고로 쓰였고 2층은 연회를 베풀 때 활용되거나 혹은 학문을 토론하는 자리로 이용된 누(樓)각으로 활용되기도 하였습니다.
다시 1782년인 정조 6년에는 동궁 건물인 중희당을 세웠으며, 다시 그 3년 후인 1785년에는 수강재가 세워지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창덕궁은 정조 다음 왕인 순조대에 이르러 또 한번 화재에 휩싸이게 됩니다. 순조 연간에는 궁궐 화재가 유독 많았던 시기로 창경궁, 경희궁 등 후기의 궁궐들은 모두 이때 한 차례씩 큰 불길에 휩싸이게 됩니다.. 이 창덕궁도 그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1803년인 순조 3년에 정전인 인정전이 불에 타 그 다음해인 1804년인 순조 4년에 중건 되는데, 현재 우리가 보는 인정전 건물은 이 때 다시 지어진 건물입니다만, 25대 철종때 한 차례 보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1811년인 순조 11년,인정전 행각에 있던 예문관과 향실이 불에 탔으며. 1833년인 순조 33년, 대조전을 비롯하여 내전 건물 대부분이 불에 탔지만, 그 이듬해에 바로 복구 되었습니다. 이후 헌종때에는 재위 12년째 되던 1846년에 낙선재가 지어졌고, 앞서 잠시 말씀 드린 인정전 보수는 25대 철종때 있었습니다.
이렇게 화재와 보수를 반복한 창덕궁은 이후 19세기 말엽 격동의 역사를 지켜 보게 됩니다.
1882년의 임오군란 당시 민겸호를 비롯한 고위 대신들이 무참하게 난군들에 의해 희생된 장소가 바로 창덕궁 금천교였으며, 1884년 갑신정변 당시 고종이 이곳을 잠시 벗어났다가 다시 되돌아 오지만 그 사이 창덕궁은 청나라와 일본군의 교전장으로 탈바꿈하게 됩니다. 그리고 1894년을 전후로 고종이 경복궁으로 이어하면서 창덕궁은 잠시 빈 궁궐이 됩니다.
1907년, 을사보호조약(1905년 체결)의 여파로 우리의 외교권이 상실된 가운데, 고종은 일제의 부당한 침략행위를 호소하고자 네덜란드 헤이그 만국평화회의에 이준 이상설 등 밀사를 파견하지만, 곧 일본에 들키게 되고 이 책임을 빌미로 고종은 황태자에게 억지로 황위를 떠 넘기게 됩니다. 그 황태자가 바로 마지막 황제 순종이었고, 숭순종은 즉위식을 가진 이후 곧장 창덕궁을 수리하게 하여 창덕궁으로 옮겨 오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이미 국권은 일제에 의해 거의 넘어가 있었던 상태였고, 급기야 이름만 걸어놓고 그 명맥만 간신히 유지해 오던 대한제국 (1897년 고종에 의해 수립)은 조선이란는 이름으로 격하되면서 1910년 일제에 의해 강제로 합병되었습니다. 그 합병 조약 체결 장소가 바로 인정전이었고, 강제 합병을 의논하기 위해 회의를 열었던 장소가 바로 대조전 흥복헌이었습니다.
1917년, 이른 바 내전갱의실이라 불리우는 상궁들 처소에서 일어난 화재로 창덕궁의 내전 주요 건물들이 대부분 불에 타게 됩니다. 순종과 황후는 급히 연경당으로 피신하였다가 낙선재로 옮겨 오게 됩니다만, 일제는 이것을 구실로 정궁인 경복궁의 건물들인 강녕전, 교태전, 연길당, 함원전, 만경전, 연생전, 경성전 등 주요 내전 건물들을 헐어다가 창덕궁 내전으로 복구하게 되는데, 이때 강녕전 건물은 희정당 건물로, 교태전 건물은 대조전 건물로 각각 꾸며 놓았습니다.
그러므로 현재 우리가 볼 수 있는 희정당이나 교태전 건물들은 모두 본래의 건물들이 아닌 일제때 강제로 뜯겨다 지은 경복궁의 건물들이었습니다. 또한 심지어 그들은 인정전 둘레의 회랑까지 제 멋대로 개조해 버리고 전시장 및 대기실로 만들어 버리는 추악한 횡포를 보이게 됩니다.
이렇게 보존되어 온 창덕궁은 1977-79년까지의 대대적인 복원 보수 공사를 통해 옛 모습을 되찾는 데 주력하여 현재 가이드에 의한 안내 관람을 하고 있고, 1995년부터는 훼손된 인정전 행각을 복원하였으며, 현재 규장각 권역 건물들이 복원, 2004년 경에 완공될 예정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뭐니뭐니해도 주목해야 할 것은 1995년에 세계 문화 유산으로 지정되었다는 점입니다. 보존이 잘 되어 있고, 빼어난 경관이 세계인들 모두가 보존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는데요. 세계 문화 유산에 걸맞는 보존이 될 수 있도록 많은 관심 가져야 하겠습니다.
뉴스타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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