버지니아 역사 산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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버지니아 역사 산책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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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남북전쟁 (2) (1862년 8월 - 1863년 5월)

 
   
  ^^^▲ 사진은 전투가 끊난 후 블러디 레인에 쌓여 있는 전사자들의 시신^^^  
 

2차 매나사 전투 (1862년 8월)

페닌술라를 통해 리치먼드를 점령하려던 작전이 실패로 돌아가자 링컨은 6만명 규모의 버지니아 군(Army of Virginia)를 새로 창설하고 서부 전선에서 잘 싸운 존 포프 장군을 지휘관에 임명했다. 포프의 임무는 워싱턴과 세난도 밸리를 방어하는 것이었다. 한편 로버트 리는 매클랜란이 다시 공격하지 않을 것임을 알고 스톤월 잭슨으로 하여금 고든빌로 향해서 포프의 군대를 차단하도록 명령했다. 리는 또한 북군이 매클랜란의 부대와 포프의 부대로 분리되어 있는 상황을 이용해서 먼저 포프의 군대를 파괴한 후에 매클랜란의 군대에 대처하려 했다.

8월 9일, 스톤월 잭슨의 군대는 북군과 조우해서 전투를 벌였고, 먼저 공격한 북군은 남군의 반격을 받고 후퇴했다. 잭슨은 포프 장군 휘하의 병력이 결집해 있는 것을 알고 고든빌로 후퇴했고, 로버트 리는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잭슨과 합류하라고 지시했다. 8월 22-25일간은 폭우가 와서 전투는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8월 27일, 잭슨의 군대는 북군을 우회해서 매나사 철도 교차로를 공격해서 북군의 보급품을 파괴하고 또 노획했다. 이에 놀란 포프 장군은 병력을 라파하녹 강 건너 북쪽으로 철수시켰다. 27일-28일 밤, 잭슨은 휘하 부대를 1차 매나사 전투가 있었던 스토니 능선 아래 방치된 철길 뒤로 이동시켰다.

8월 28일 저녁 6시 넘어서 잭슨의 남군이 포격을 시작해서 양측은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북군은 많은 희생을 무릅쓰고 고지에 위치한 남군을 향해 공격을 했고, 밤 9시가 되어 전투가 끝났다. 포프는 잭슨의 부대를 포위할 수 있다고 보고 다음 날 아침 공격을 명령했다. 8월 29일에도 잭슨의 부대와 북군은 철길을 가운데 두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오후에 롱스트리트 장군의 남군이 잭슨의 우측에 도착했다. 이 때 남군과 북군의 지휘관이 예하 부대에 보낸 명령이 혼선을 빚는 사태가 벌어졌다. 로버트 리는 롱스트리트에 대해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롱스트리트는 자신의 부대가 길게 늘어져 있었고 로버트 리의 지시는 직접적 공격을 명한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공격을 하지 않았다. 북군에서는 포프가 포터 장군에게 공격명령을 내렸지만 전령이 길을 잃어서 제 때에 전달되지 못했다. 포프는 키어니 장군에게 잭슨의 좌익을 공격하라고 명령해서 오후 5시부터 치열한 공방전이 벌어졌고, 잭슨의 좌측이 뜷릴 위험에 처했으나 남군은 결국 북군의 공격을 물리쳤다.

로버트 리는 헨리 하우스 힐로 향하는 북군 1군단을 발견하고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공격하도록 명령했는데, 롱스트리트는 북군이 견고한 방어진을 치고 있다면서 공격을 해서는 안 된다고 로버트 리에게 항변하자 로버트 리는 명령을 취소했다. 롱스트리트 장군이 이 때 공격을 하지 않은 사실은 나중에 비판의 대상이 됐다. 한편 포프는 남군의 병력이 증강된 것을 알고도 자신의 병력을 근처까지 온 매클랜란 장군의 포토맥 군에 합류시키지 않았다. 포프와 경쟁관계에 있었던 매클랜란도 포프를 돕기 보다는 오히려 자기 병력을 서서히 움직여서 포프가 패배하면 자신이 동부 전선을 총지휘하게 될 것을 기대했다.

8월 30일 포프 장군은 남군이 후퇴하는 줄 알고 잭슨의 부대를 공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남군은 진지를 지키면서 북군의 공격을 기다리고 있었고, 치열한 근접전 끝에 양측은 많은 전사상자를 냈다. 이 때 로버트 리는 롱스트리트 장군에게 북군이 장악하고 있는 헨리 하우스 힐을 공격하라고 명령했으나 북군이 선방해서 롱스트리트는 이곳에 도달하지 못했다. 저녁 8시가 되자 포프 장군은 후퇴를 명해서 북군은 센터빌 방향으로 대오를 갖추어 물러났다. 남군은 북군을 물리쳤으나 로버트 리는 북군을 파괴하지는 못했다. 링컨은 포프 장군을 해임했고, 부대는 매클랜란 장군의 부대로 합병됐다.

하퍼스 페리 전투 (1862년 9월 )

2차 매나사 전투에서 북군을 물리친 로버트 리는 북부를 공격하고자 했다. 그는 이렇게 해서 북군에 계속 타격을 주면 링컨이 남부 연합에 대해 협상을 하자고 제안할 줄 알았다. 그러나 링컨과 그의 각료들은 그럴 생각이 전혀 없었다. 로버트 리는 포토맥 강을 건너 메릴랜드로 넘어 갔고, 샵스버그에서 북군을 만나서 치열한 전투를 하게 되는데 그것이 앤티탬 전투다.

버지니아 북서쪽에 위치한 하퍼스 페리(Harpers Ferry)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포토맥 강의 지류인 세난도 강이 포토맥 강과 합류하는 지점으로 강을 건너면 메릴랜드인데, 그곳에는 미군의 무기제조 공장과 무기고가 있었다. 1859년 7월에 노예폐지론자인 존 브라운이 아들들과 함께 이곳 무기고를 점거해서 노예해방을 주장하려다가 로버트 리 대령이 지휘하는 해병대에게 포위되어 아들 4명은 모두 사살되고 본인은 잡혀서 사형을 당한 일이 발생하기도 했다.

4만 병력을 이끌고 메릴랜드로 올라가던 로버트 리는 북군 병력이 주둔하고 있는 하퍼스 페리를 점령할 필요를 느꼈다. 하퍼스 페리에 북군 14,000 병력을 두고서 메릴랜드로 북상하는 것이 위험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로버트 리는 매클린 장군이 이끄는 북군 병력이 자신이 이끄는 남군 보다 두 배나 많음을 알고도 부대를 둘로 나누어서 자기가 이끄는 본대는 곧장 메릴랜드로 넘어가고 스톤월 잭슨에게 2만 병력을 이끌고 하퍼스 페리를 점령하라고 했다.

당시 하퍼스 페리에는 딕슨 마일스 대령이 지휘하는 14,000 명 북군 병력이 있었다. 맥글랜란 장군은 이 병력을 철수시켜서 본대에 합류시키기 원했지만 워싱턴의 북군 총참모장인 핼릭 대장은 딕슨에게 하퍼스 페리를 사수하라고 명령했다. 하퍼스 페리는 사방에 고지 능선이 있어서 북군은 고지에 진지를 구축하고 경비를 했어야만 했지만 마일스 대령은 그런 생각이 없는 무능한 지휘관이었다. 마일스는 단지 북쪽의 메릴랜드 고지 중간에만 포대와 병력을 배치했는데, 이들은 미숙한 장병들이었다.

스톤월 잭슨은 9월 12일 저녁에 메릴랜드 고지로 접근하던 남군 부대는 북군과 조우해서 교전을 했다. 13일 이른 아침 남군이 메릴랜드 고지를 공격해서 전투가 벌어졌고, 오후에 북군은 패퇴하고 말았다. 14일 오전에 잭슨의 다른 부대가 서쪽의 볼리바르 고지과 남쪽의 루둔 고지에 조용히 올랐고, 잭슨은 포대를 능선으로 옮기도록 했다. 오후 1시에 남군은 능선에서 하퍼스 페리를 향해 포격을 했고, 남군 병사들이 능선에서 아래로 내려갔다. 이 때 하퍼스 페리에 있던 북군 기병대 병력 1400명이 탈출에 성공해서 샵스버그로 향했는데 이 때 로버트 리의 본대의 후미를 가던 남군의 탄약 마차 40량을 탈취하는 성과를 올렸다.

9월 15일 새벽까지 남군은 고지에 포대를 완전히 배치했고, 잭슨은 오전 8시를 기해 전면적인 포격을 하고 보병으로 하여금 3면에서 공격하도록 명령했다. 전의를 상실한 마일스 대령은 백기를 들고 항복하기로 했는데, 그 때 포탄이 떨어져서 중상을 입고 다음 날 사망했다. 나흘 간 전투 중 양측의 전사상자는 비슷했지만 북군 12,419명이 항복했고, 13,000 정의 소총, 포 73문과 보급품이 남군의 수중에 들어갔다.

북군은 부대원 거의 전원인 12,400명이 항복하는 치욕적인 패배를 당했고, 과감한 용병술로 잭슨은 또 다시 영웅이 됐다. 그러나 잭슨은 승리를 자축할 시간이 없었다. 로버트 리는 잭슨에게 삽스버그의 상황이 심각하다면서 급히 오라고 전령을 보냈기 때문이다.

앤티탬 전투 (1862년 9월)

매클랜란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은 75,000명인데 비해 로버트 리가 지휘하는 남군은 그 절반이 38,000명이었고, 그나마 절반 병력이 하퍼스 페리에서 아직 도착하지도 않았다. 매클랜란은 로버트 리의 병력이 10만 명은 되는 줄 알고 공격에 주저하고 있는 사이에 남군은 안티탬 크릭을 따라서 방어진을 칠 수 있었다. 9월 16일, 드디어 맥클랜란은 안티탬 크릭을 건너서 공격할 것을 명령했다. 17일 새벽 5시 30분, 조셉 후커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 1군단이 먼저 남군의 좌측을 공격했고, 번사이드 장군이 지휘하는 11군단이 안티탬 크릭의 다리를 확보하고 남군의 우측을 공격했다. 좁은 장소에서 양측의 포대가 불을 뿜었고, 근접 전투가 벌어져서 양측의 인명 손실이 엄청났다. 오전 7시에 하퍼스 페리에서 밤새 진군해 온 스톤월 잭슨의 부대가 도착해서 남군은 반격을 개시했다.

오전에는 던커 교회 건물을 둘러싸고 치열한 전투가 벌어졌다. 9시30분부터 오후 1시까지 700미터 정도의 낮은 도랑에선 북군 3,000명과 남군 2,600명이 죽어서 시체가 도랑을 가득 메웠는데, 그 후에 그 도랑은 ‘블러드 레인’(피의 선‘)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정오부터는 안티탬 크릭의 다리를 두고 번사이드가 지휘하는 북군과 잭슨 휘하의 남군이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오후 3시 넘어서 하퍼스 페리에서 출발한 A. P. 힐 장군의 사단이 도착해서 남군 병력이 증강되었고 북군의 공격은 실패하고 말았다. 소심한 성격의 맥클랜란은 2개 군단을 예비병력으로 갖고 있었음에도 번사이드의 군단을 지원하라고 명령하지 않았고 번사이드는 더 이상 공격을 할 수 없었다. 그날 오후 5시경까지 계속된 단 하루 동안의 전투에서 양측에서 22,000명이 죽거나 부상했다. 모두 전사상자가 많아서 더 이상 전투를 할 수 없게 되자 북군이 물러났고 로버트 리도 부대를 버지니아로 철수시켰다.

앤티탬 전투는 단 하루 전투에서 가장 많은 전사상자를 낸 참혹한 전투였다. 너무나 많은 전사상자가 나와서 남과 북의 언론은 다 같이 “이것은 전투가 아니라 살육이다”고 절규했다. 양측의 전사상자 숫자는 비슷했으나 병력에 대비해서 남군이 보다 많은 인명 손실을 입었다. 이 전투에서 북군은 처음으로 비기게 되어 링컨은 비로소 안도를 했다. 남군이 북부를 침입해서 벌인 첫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지 못한 로버트 리는 부담을 안게 됐다. 링컨은 남군 보다 두 배나 많은 병력을 갖고도 승리를 하지 못한 매클랜란 장군이 너무 소극적이라고 생각해서 그를 해임했는데, 매클랜란은 군복을 벗고 정치인이 되어서 1864년 대통령 선거에 링컨에 대항해서 출마해서 남부와의 협상을 주장했다. 이 전투에서 나중에 대법관이 된 올리버 홈스가 북군 기병대 초급장교로 참전해서 부상을 입었다. 패배의 악몽에서 겨우 벗어난 링컨은 노예해방령을 선포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 (1862년 12월)

앤티탬 전투에서 많은 병력을 상실한 로버트 리는 버지니아로 돌아왔다. 링컨은 율리시즈 그랜트 장군으로 하여금 미시시피 빅스부그에 결집해 있는 남군을 공격하라고 명령했고, 앰브로스 번사이드 장군을 포토맥 군(Army of Potomac) 지휘관으로 임명해서 버지니아를 침공하도록 했다. 번사이드가 지휘하는 11만 명 대군은 세난도 계곡에서 북군과 소규모 전투를 벌이고 있는 스톤월 잭슨의 군대를 피해서 라파하녹 강 하류에 위치한 프레데릭스버그를 향했고, 11월 17일에 라파하녹 강의 북쪽에 도착했다.

로버트 리는 북군이 동남쪽으로 이동하느냐고 속도가 늦는 것을 보고 북군을 프레데릭스버그에서 맞아 싸우기로 했다. 리는 롱스트리트 장군이 지휘하는 1군단을 북군이 강을 건너오는 것을 내려다 볼 수 있는 매리 고지에 포진시켰다. 스톤월 잭슨이 지휘하는 2군단이 1주일 강행군을 해서 11월 29일에 로버르 리의 사령부에 도착했다. 로버트 리는 잭슨의 군단과 제브 스튜어트의 기병사단을 남쪽에 배치했다.

12월 11일, 북군은 5,000발 이상의 포격을 가해서 프레데릭스버그를 완전히 파괴했고, 마을을 점거했다. 프레데릭스버그 남쪽에서 강을 건넌 프랭클린 장군의 북군은 숲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던 스톤월 잭슨의 군대와 스튜어트의 기병 포병의 공격을 받고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남군의 완강한 저항에 많은 희생자를 낸 북군은 물러났다. 12월 13일, 섬너 장군과 후커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은 남군이 진을 치고 있는 메리 고지를 향해 무리한 공격을 펼쳤지만 막대한 피해를 입고 물러났다. 남군은 약 5,400명의 전사상자를 냈지만 두 배의 병력을 투입한 북군은 약 13,000 명의 전사상자를 내고 후퇴했다. 프레데릭스버그 전투는 남군의 승리였다.

챈슬러빌 전투 (1863년 5월)

링컨은 번사이드 장군을 해임하고 포토맥 군 사령관으로 조셉 후커를 임명했다. 1863년 4월 27-28일, 후커 장군은 14만 명의 대군을 이끌고 라파하녹 강을 건너 챈슬러빌과 프레데릭스버그를 침공했다. 후커는 7만 명 병력을 챈슬러빌로 보냈고, 로버트 리는 프레데릭스버그에 있던 스톤월 잭슨으로 하여금 챈슬러빌로 이동하도록 했다. 병력이 부족함을 느낀 로버트 리는 부족한 병력을 분리해서 공격하는 도박 같은 작전을 택한 것이다. 잭슨은 북군에 포착되지 않도록 신속하게 병력을 이동해야 했고 스튜어트의 기병대는 북군을 상대로 파상적 공격을 가해서 잭슨의 이동을 은폐했다.

5월 2일 오후 5시 30분, 스톤월 잭슨이 지휘하는 남군 2군단은 챈슬러빌에 주둔 중인 북군 11군단을 기습해서 단숨에 궤멸시켰다. 그러나 전투가 끝나고 숲속을 정찰하던 잭슨은 다른 남군 부대의 오인 사격으로 왼팔에 부상을 당했고, 후방으로 후송되어 치료하던 중 5월 10일에 사망했다. 5월 3일 스튜어트가 임시로 지휘하는 남군 2군은 북군 3개 군단을 향해 치열한 공격을 가했다. 이 날 전투에서 양측은 18,000명의 전사상자가 나왔다. 프레데릭스버그에 진주한 북군 6군단은 자신들을 상대할 남군 병력이 적다는 것을 몰랐다. 이들이 5월 3일 남군의 배후를 향해 공격을 시작했는데, 이때는 챈슬러빌 전투를 끝낸 앤더슨 장군이 지휘하는 남군 사단병력이 프레데릭스버그에 도착한 후였다. 세즈윅 장군이 지휘하는 북군은 남군을 돌파하지 못하고 결국 강을 다시 건너서 후퇴했다.

챈슬러빌 전투도 남군의 빛나는 승리였다. 북군에 비해 5대 2로 열세인 병력을 갖고 남군은 북군을 패퇴시켰지만 남군 보병 52,000명 중 13,000명이 전사상자가 되는 피해를 입었다. 북군은 유럽에서 들어온 이민자들을 신병으로 보충하는 등 인적 자원이 풍부했지만 남군은 그렇지 못했다. 특히 스톤월 잭슨이 전사해서 앞으로의 작전과 남부의 사기에 좋지 않은 영향을 주었다. 로버트 리는 잭슨이 사망했다는 소식을 듣고 “이제 잭슨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 하고 탄식했고, 남부의 수도 리치먼드에서 열린 잭슨의 영결식에는 수많은 시민들이 참석해서 애통한 심정을 달랬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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