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 네 살 때의 나는
스크롤 이동 상태바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시로보는 세상112>김경미 '비망록'

햇빛에 지친 해바라기가 가는 목을 담장에 기대고 잠시 쉴 즈음, 깨어보니 스물 네 살이었다. 神은, 꼭꼭 머리카락까지 조리며 숨어 있어도 끝내 찾아주려 노력하지 않는 거만한 술래여서 늘 재미가 덜했고 타인은 고스란히 이유 없는 눈물 같은 것이었으므로.

스물 네 해 째 가을은 더듬거리는 말소리로 찾아왔다. 꿈 밖에서는 날마다 누군가 서성이는 것 같아 달려나가 문 열어 보면 아무 일 아닌 듯 코스모스가 어깨에 묻은 이슬발을 툭툭 털어내며 인사했다. 코스모스 그 가는 허리를 안고 들어와 아이를 낳고 싶었다. 유잣속처럼 붉은 잇몸을 가진 아이.

끝내 아무 일도 없었던 스물 네 살엔 좀더 행복해져도 괜찮았으련만. 굵은 입술을 가진 산두목같은 사내와 좀더 오래 거짓을 겨루었어도 즐거웠으련만. 이리 많이 남은 행복과 거짓에 이젠 눈발같은 이를 가진 아이나 웃어줄는지. 아무 일 아닌 듯 해도.

절벽엔들 꽃을 못 피우랴. 강물 위인들 걷지 못하랴.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인들 다시 못 쓰랴.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실낱처럼 가볍게 살고 싶어서였습니다.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도록.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었을까요.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이 세상과 나 자신을 향한 지독한 열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우주와 삼라만상, 그리고 어딘가에 분명하게 존재할 것만 같은 신에 대한 끝없는 열병, 나 자신과 나 자신을 둘러싸고 있는 사람들에 대한 깊은 열병, 그 지독한 열병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 기린초
ⓒ 우리꽃 자생화^^^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지독하게 많은 술을 마셨고, 아스라히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녔습니다. 어떤 날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술을 마시다가 자신도 모르게 서러워 꺼억 꺼억 울기도 했습니다. 또한 내가 한번도 가보지 않았던 땅 끝으로 훌쩍 여행을 떠나 , 그곳에서 소식을 끊고 며칠간 머무르기도 했습니다.

그리고 사랑을, 지독하게도 내 가슴을 물고 마구 흔들어대는 그 안타까운 사랑을 깨끗하게 버리고 싶었습니다. 하지만 그 버림 뒤에 다가올 무섭도록 처절한 그리움을 생각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그 사랑이, 내가 죽을 때까지 잊혀지지 않을 그런 사랑이라는 것을 까맣게 모르고 있었습니다.

그랬습니다.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절벽엔들 꽃을" 피울 수 있을 것만 같았고, "강물 위"라도 걸어다닐 수가 있을 것만 같았습니다. 또한 그렇게 "문득 깨어나 스물 다섯이면 쓰다만 편지"를 다시 쓰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오래 소식 전하지 못해 죄송했습니다."

스물 네 살 때의 나는 그냥 그렇게 하는 것이 "실낱처럼 가볍게" 사는 것이라고 여겼습니다. 내가 가진 모든 것을 그렇게 깡그리 버리는 것이 "아무 것에도 무게 지우지 않"는 것인 줄 알았습니다. 죄송합니다. 정말 죄송합니다. 그때 그 아름다운 사랑을 지키지 못해 정말 죄송하다는 말씀을 드립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