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정일 談談打打 굿판 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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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談談打打 굿판 6자회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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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정일 내통 야합세력 투항세력에 6자회담 파탄 책임

지난 8일부터 11일 사이 일정을 하루 연장해 가면서까지 3박 4일간 북경에서 열린 6자회담이 핵심의제인 "시료채취(Sampling)문제 합의에 실패" 하면서 성명서 채택도 없이 허망하게 끝났다.

北은 못 믿을 대화 상대

김대중은 北에 있는 남침전범집단수괴 김정일을 "식견 있는 지도자, 신뢰할 수 있는 대화상대"로 평가 했지만 스스로 서명하고 전 세계에 TV로 생중계 된 답방약속을 무산시킨 김정일을 아직까지도 '신뢰'하고 있느냐 여부는 별개 문제로 치자.

북이 합의한 틀 안에서 행동해 온 것은 1953년 7월 27일 오전 10시 합의 서명 발효 된 "정전협정"이 유일한 것이며 대외적으로 잘못을 시인사과 한 것은 1976년 8월 18일 김정일에 의해서 자행 된 판문점도끼만행에 대하여 1976년 8월 21일 UN군의 미루나무절단작전 당일 "김일성의 유감성명"을 발표 한 것이 유일하다.

그런가 하면 1972년 7.4남북공동성명, 1992년 2월 19일 남북합의서 및 비핵화선언, 2000년 6월 15일 6.15선언에 이르기까지 북이 합의사항을 성실하게 준수 이행한 것은 단 한 件도 없으며 심지어는 1994년 10월 21일 미국과 제네바 핵합의조차 휴지 쪽을 만들고 급기야는 6자회담마저 핵 검증 "표본채취"를 거부함으로서 파탄으로 내 몰고 있다.

북이 손을 드는 조건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은 패전과 스탈린사망으로 파멸의 문턱에서 궁지에 몰린 남침전범원흉 김일성이 유일한 후견인인 모택동의 지시에 따라서 마지못해 두 손을 들은 것이며 1988년 서울 올림픽 방해를 공언하던 김일성과 김정일 부자가 꼬리를 내린 것은 휴전선 상공에 B-52 전략폭격기가 뜨고 동서해상에 항공모함이 배치 됐기 때문이었다.

그런가 하면 판문점 도끼만행을 저지른 망나니 아들 김정일 때문에 최고의 전시동원태세 '폭풍 1호'까지 발령하면서 버티려던 김일성이 무릎을 꿇고 '유감성명'까지 전달하게 된 배경은 휴전 이래 최초로 실제 전투준비태세인 데프콘 2까지 발령해가면서 단호하게 대처한 폴 버니언작전(Operation Paul Bunyan)이라고 명명 된 한미합동 미루나무 절단작전 때문 이었다.

1976년 8월 21일 도끼만행 응징작전에 동원된 전력은 미국 본토에서 핵 탑재가 가능한 F111전투기 20대가 날아왔고, 괌에서는 B-52 폭격기 3대, 오키나와 미공군기지에서는 F4 24대가 한반도 상공을 선회하였다.

또한 함재기 65대를 탑재한 미 7함대 소속 항공모함 미드웨이호가 순양함 등 중무장한 5척의 호위함을 거느리고 동해를 북상하여 북한 해역으로 이동하여 무력시위를 펼쳤다.

이와 동시에 교전상황에 대비한 우발계획으로 미루나무 절단 작업 시 교전사태가 발생할 경우 개성지역 북괴군 부대는 물론 개성 북방 시변리까지 포격 초토화하고, 북의 포병부대를 궤멸시키고 전쟁이 확대될 경우 개성과 연백평야에 대한 탈환까지도 고려한 상태에서 겁을 집어 먹은 김일성이 '유감성명'으로 무릎을 꿇은 것이다.

만약 1994년 1차 핵 위기 시 김영삼이 1976년 미루나무 절단작전 당시 박정희 대통령만큼의 군사전략에 대한 소양과 위기대처 능력만 갖췄더라도 한반도 핵문제는 김일성이 무릎을 꿇고 핵 프로그램을 완전히 폐기케 함으로서 일찍이 끝장 낼 수 있었을 것이다.

담담타타 2보 후퇴 1보 전진

남침전범집단은 일방적으로 수립한 그들의 담판투쟁(談判鬪爭)목표를 결코 변경하거나 포기하지 않는다.

그들이 내세우는 대표단은 고도로 전문화 된 '담판꾼' 으로서 그들이 추구하는 결론이 포함되지 않으면 회담의제조차 합의를 않는다.

회담 도중에 엉뚱한 제안이나 사건(트집)을 조작하여 선전에 이용하거나 담판을 유리하게 이끌려하면서 매개 국면마다 의도적으로 난관과 장애를 조성하여 상대방의 인내심이 한계에 다다르게 만든 후, 사소한 부분에서 '양보'의 기미를 보여 희망을 갖게 하고 사후에 '위반이나 파기'를 전제로 일시적인 '합의'를 해 준다.

담판과정에서는 "거짓말과 사실왜곡"을 밥 먹듯 하고, 일방적인 주장을 끊임없이 반복하여 상대를 질리게 만든 다음 "엉뚱한 문제"를 일으켜 이를 양보하는 체 하면서 근본문제에 대한 양보를 유도하여 상대가 양보를 하면 이를 <약점>으로 삼아 더 큰 양보를 강요한다.

그들은 일단 이루어 진 합의에 대해서도《실천.이행 단계에서 거부(번복)의 단초》를 미리 준비해 두고 《합의 자체를 부인하거나 해석상의 차이》로 이행을 불가능케 만든다.

전범집단의 이런 수법은 소위 談談打打 전략과 一步前進 二步後退 전술의 전형(典型)이라 할 수 있는바 한미 양국이 1951년 7월 10일 개성에서 시작한 "한국전쟁휴전회담"이 만 2년 17일을 끌면서 1953년 7월 27일 판문점에서 서명 발효 되까지 북의 '담판전략'의 쓴맛을 보고도 그 교훈을 제대로 살리지 못한 것이다.

55년 전 2년 넘게 끈 휴전협상의 교훈을 살렸다면 2003년 8월 27일 제 1차 6자회담에서 2008년 12월 8일 제 8차 6자회담에 이르기까지 5년 넘게 김계관 이라는 전문담판꾼에게 한. 미. 일. 중. 러 5개국 특히 《한미일 3국》이 도매금으로 우롱을 당하는 망신은 면 했을 것이다.

김정일은 6자회담을 통해서 ▲핵무기 완성에 필요한 시간확보 ▲에너지 및 식량원조 확보 ▲ 핵실험 강행을 통한 핵 보유 기정사실화 ▲핵보유국 지위획득의 발판 마련 ▲대미협상력 극대화 ▲대남 핵 공갈 능력 확보라는 열매를 따 먹는 동안 대한민국이 얻은 걷은 $와 에너지 쌀과 비료 등 <鳳 노릇>을 한 게 고작이다.

비열한 투항주의자들

김영삼 시절 미국 크린턴 행정부 갈루치가 강석주 농간에 놀아났듯 노무현 시절 부시정부 크리스토퍼 힐이나 한국의 김숙 대표가 김계관 농간에 놀아나기는 마찬가지가 아닌가 한다.

1994년 10월 21일 제네바 핵합의가 2002년 10월 김정일의 '고농축 우라늄' 의혹 한방에 파탄이 났듯이 설사 6자회담에서 어떤 합의가 도출되어 새로운 협정이 체결 된다 할지라도 지금까지 경험과 교훈으로 보아 그 실천과 이행에 대한 보장은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북핵문제 6자회담이 허망하게 표류하는 원인은 북의 교활하고도 불성실한 談談打打 전략 탓만 있는 것이 아니라 "한반도에서 전쟁은 없다."고 잠꼬대를 하면서 "핵실험 미국 탓"이라고 김정일 선전원 노릇을 해온 김대중과 "핵 개발 북 주권문제"라고 떠벌여 댄 노무현 등 김정일과 내통야합하고 있는 투항주의자들 탓이 더 크다.

김대중과 노무현, 민노당과 민주당, 진보신당과 창조한국당 그리고 전교조와 민노총, 한총련과 범민련, 전국언론노조와 '진보연대', 참여연대와 환경연합 등 친북세력들은 "비핵화는 김일성 수령님의 遺訓"이라고 떠 벌여 대는 김정일의 꾐수에 목을 매고 있는 비열한 패배주의자 들 탓이기도 하다.

대한민국의 제 3의 선택

이제 북핵문제는 原點에서 근원적으로 다시 접근해야 한다. 미국방성 문서에까지 '북 핵보유'가 명문화 된 이상 대한민국이 이미 휴지 쪽이 돼 버린 1992년 1.19일 서명된 남북비핵화선언에 더 이상 구애를 받아야 할 이유는 없다.

미국이 만약 《北 핵무장을 허용하면서 대한민국의 발전용 핵연료 재처리까지 막는다면 》 그런 미국과의 동맹은 마땅히 재고해야 할 것이다.

이제부터 대한민국은 한마디로 소련을 붕괴 해체시킨 미국의 레이건처럼 북 남침전범집단과 무한 군비경쟁에 돌입을 선언하는 것이 <핵무장인질강도전범집단>북을 해체 멸망시키는 첩경이 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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