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한국의 좌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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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집] 한국의 좌표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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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산업혁명과 테크노크라트 - ④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테크노크라트에 의한 종합제철 건설안

나는 석유화학건설 계획을 수립하면서 「엔지니어링 어프로치」(공학적 접근방법)를 공업정책에 활용하는 이론을 차차 정리하기 시작했는데, 이 때 석유화학과 종합제철은 근본적으로 다른 길을 가고 있다는 것을 실감하게 되었다. 종합제철 추진 과정에서는 순서가 완전히 뒤바뀌었다고 느낀 것이다. 그래서 자연히 종합제철에 대해서 엔지니어링적으로 생각해 보기 시작했다.

속셈으로는 종합제철 건설을 나에게 맡겼을 경우를 대비 해서였다. 그리고 이번에 IECOK 회의에 참여 하게된 것도 이러한 사실을 알고 있는 朴 부총리가 나에게 기술적인 면에서 자문해 달라는 취지였다고 본다.

IECOK 회의에서 포항종합제철에 대한 자금확보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느끼고 나는 ―단원의 일원으로서, 또한 단장인 朴 부총리를 돕고자― 대안을 찾아야겠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일본에서 자금을 얻을 수 있을까 해서 일본 통산성의 수출진흥국장을 만났는데 무척 희망적이었다. 이런 이유로 KISA 안을 깨고 일본청구권 자금을 활용하는 쪽으로 방향을 바꾸는 것이 좋겠다고 생각했다. 그 방안은 다음과 같다.

(1) 규모 문제 : 우선, 규모 면에서 석유화학은 국제규모가 30만 톤인데 10만 톤으로 건설키로 했으니 국제단위의 1/3이 된다. 이런 식으로 생각하면 종합제철은 국제 규모가 300만 톤이기 때문에 최소한 100만 톤 단위는 되어야 한다. 그리고 석유화학은 15만 톤까지 증설할 수 있는 설계를 갖고 출발하고 있으니 ―똑같은 이치에서― 종합제철도 150만 톤 규모로 착수하는 것이 유리할 것이다. 국제 규모의 1/2이 될 때 출발하자는 뜻이다.

그러나 수요가 국제규모가 될 때까지 무작정 기다릴 수가 없으니 100만 톤 정도로 출발을 하고 준공과 동시에 추가 증설을 해서 국제규모로 키워나가야 할 것이다. 그러자면 종합제철 건설과 동시에 철강수요를 늘이는 정책을 펴나가야 한다. 철강의 수요 처는 기계공업이다. 결국 종합제철의 성공 여부는 기계공업의 발전 여부에 달려 있다. IBRD에서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전에 우선 기계공업을 육성하라고 권고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2) 당시 우리나라의 기계공업 : 기계공업은 노동 집약적인 산업으로서 우리나라로서는 아주 적합한 업종이다. 그러나 (당시) 우리나라의 기계공업은 매우 유치한 상태로 기술도 없고 기술자나 숙련공도 없었다. 선진국에서는 100여 년에 걸쳐 경험을 쌓아가며 조금씩 발전해서 현재의 기계공업이 이룩된 것이다.

그러니 기계공업은 선진국에서나 하는 것이지 우리나라와 같은 후진국에서는 엄두도 내지 못하는 사업으로 생각하고 있다. 결국 국내에서 필요한 기계는 수입에 의존하게 됐고 수출한다는 생각은 없었다. 경공업 쪽의 섬유산업과는 사정이 전혀 다른 것이 현실이다.

우리나라의 경제발전 기본전략은 최종 제품부터 수출을 개시해서 점차로 공업구조를 심화시켜 나가는 피라미드식 CEOI이다. 그렇다면 여러 가지 기계제품 중에서 우리나라에 적합한 업종을 찾아내야 한다. 고려대상이 되는 것은 고도의 기술이 필요 없고 인력이 많이 소요되는 조선공업, 화학플랜트 등 철구조물 제작과 어느 정도 국내수요가 있는 자동차공업 등 일부 정밀기계공업이다. 그렇지만 국제수준급인 기계공업을 육성한다는 것은 매우 어려운 사업이라고 느껴진다.

그렇다고 북한에서 강행하고 있는 「자력갱생 · 자급자족」 정책을 취하게 되면 수요는 발생하게 되겠지만 품질이 나쁜 기계를 가격을 무시하고 제작할 수밖에 없게 된다. 결국 우리나라는 어떠한 시련을 겪는 한이 있더라도 국제 수준급인 기계공업을 하루 속히 육성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3) 종합제철의 성격 : 기계공업이 발달되지 않아 수요가 없는 상태에서 100만 톤 급의 종합제철을 건설하자면 제품의 상당량은 수출할 수밖에 없다. 결국 종합제철은 품질이나 가격 면에서 초기 단계부터 수출 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이것이 우리나라에서 건설하고자 하는 종합제철에게 부여된 명제(命題)인 것이다.

(註 : 국제경쟁력이 없을 때에는 생산가 이하로 팔아야 하니 적자 경영을 할 수밖에 없다. 한 예로 당시 국내의 냉간압연(冷間壓延) 공장에서는 종합제철 제품의 일종인 핫코일(Hot Coil)을 수입해서 냉간압연 제품을 수출하고 있는데 전망이 밝다. 이에 따라 이 공장에서 필요로 하는 소재인 핫코일(Hot Coil)의 수입량이 늘고 있는데 만일 우리나라에서 건설코자 하는 종합제철에서 국제가격으로 생산 못할 때에는 종합제철로서는 적자로 판매할 수밖에 없다. 그렇지 않고서는 냉간압연 업계에서는 외국에서 수입을 계속할 것이고 종합제철로서는 판로가 없게 된다. 브라질의 제철소가 실패한 예가 이에 해당된다. 더욱이 이 제철소에는 IBRD가 자금지원을 했다. 포드자동차 사장을 지낸 경영전문가이자 미국 국방장관을 역임한 IBRD의 맥나마라(Robert S. McNamara) 총재가 경제적 타당성에 대해서 언급한 것이 바로 이런 연유이다).

(4) 종합제철 건설사업에 대해서는 우리나라의 테크노크라트가 총책임을 지고 엔지니어링 작업을 실시해서 완전한 검토를 하고 난 후 석유화학건설 때 실시한 것과 같이 국제경쟁력을 갖도록 하는 정책적인 전략을 마련해야 한다.

(5) 종합제철은 60만 톤 규모로 출발해서는 절대로 안 된다. 우리나라로서는 150만 톤 규모가 타당한 선인데, 100만 톤으로 출발한다 하더라도 곧이어 국제 단위의 300만 톤 규모의 제철소를 건설한다는 종합계획을 갖고 착수해야 한다.

종합제철소는 크게 3개의 공정이 있다. 선철을 만드는 용광로, 선철을 강철로 만드는 제강공장, 강철을 성형하는 압연(壓延)공장이다. 용광로는 일단 100만 톤 규모로 건설하면 그 특성상 용량을 키울 수가 없으니, 철강 수요가 늘면 따로 용광로를 신설해야 한다. 이 때는 국제 규모인 공장을 건설해야 하며 수요가 늘어감에 따라 용광로 수도 계속 늘려 세계일류의 제철소로 키워가야 한다. 그러나 100만 톤 용량의 용광로를 설치한 제1차 단계에서도 국제 경쟁이 가능해야 한다는 명제에는 변함이 없다.

(註 : 1) 선철제조단계 : 제철공업(넓게는 기계공업)에서 용광로의 성격은 석유화학공업(넓게는 경화학공업)에서의 나프타 분해공장과 똑같다. 용광로에서 나오는 선철(銑鐵)가격이 국제가격보다 비싸지면 다음 단계인 제강 제품값도 비싸지고, 또 그 다음 단계인 철판이나 형강(形鋼) 등 모든 철강 제품값이 비싸지게 돼서 결국은 기계공업 전체가 국제경쟁력이 없어지게 된다. 그러니 용광로에서 나오는 선철 가격은 나프타 분해공장에서 나오는 유분(溜分)가격과 똑같이 국제경쟁력이 있어야 한다.

결국 선철값을 국제가격으로 유지시키기 위해서는 정부가 보조하는 길밖에 없는 것이다. 여러 가지 방법이 있을 수 있으나 용광로 건설에 대해서는 정부가 건설비 전액을 출자해 주는 ―결국 이자도 물지 않고 상환도 없게 해주는― 방식이 가동 초기단계에서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라고 판단된다.

2) 제강단계 : 일단 선철가격이 국제경쟁 가격이 되면 다음 단계인 제강공장부터는 해결방법이 나올 수 있다. 당시 제강에는 LD전로(轉爐)라는 새롭고 효율적인 공법이 나와서 선진국 제철소에서는 이 전로로 교체 중에 있었다. 이 LD전로는 1회 100톤이 국제규모였는데 포항제철에서 이 전로를 설치하면 국제경쟁력을 가질 수 있게 되기 때문이었다.

초기에는 2기를 설치해서 번갈아가며 1기만 가동하게 되는데, 한 기만 더 설치하면 3기 중 2기가 가동 가능하므로 처리용량은 2배로 증가돼서 생산성이 크게 향상된다. 그러니 제강공장은 처음 설계 때부터 앞으로의 확장공사를 생각해야 한다.

3) 압연단계 : 압연공장에서는 제품마다 전용 시설을 해야 한다. 이 때 초기부터 모든 제품을 소량씩 생산하기 위한 시설(註 : 북한의 예가 이에 해당된다)을 하지 말고 국내에서 가장 많이 소요되는 제품만 대량 생산할 수 있는 최신 시설을 갖춘다. 이렇게 해야 수출도 가능해지는 것이다.

예컨대 수요가 늘고 있는 핫코일(Hot Coil) 제조용 압연시설은 국제 규모로 설치하고, 조선용 대형 철판은 현재 수요가 좀 있다고 해도 다음 단계로 미룬다는 뜻이다. 이런 식으로 장차 포항종합제철이 최종 목표로 생각하고 있는 청사진을 설정하고 이를 위한 마스터플랜을 세운 뒤 종합제철건설 제1차 계획을 수립해야 후에 차질이 없고 장기적으로 봐서 경비가 절감된다. 그리고 수출 경쟁력도 갖추게 된다.)

(6) 국제경쟁력을 갖는 종합제철건설 안이 나오게 되면 차관은 얻을 수 있게 된다.

(註 : 울산석유화학 건설자금은 종합제철보다 액수가 크다. 울산석유화학 건설에 투자된 자금은 총 2억 3,413만 달러였는데, 이 중 외자는 1억 8,530만 달러(차관 1억 5,757만 달러, 외국인투자 2,773만 달러)였다. 포항종합제철(KISA 안)의 1억 달러 차관은 석유화학과 비교하면 절반을 약간 넘은 액수이다. 석유화학에서 이렇게 큰 액수의 외자를 확보할 수 있었던 단 한 가지 이유는 사업성이 건전했다는 점이었다. 한 예로, 석유화학건설 때 카프로락탐공장은 한국측에서 단독 투자해서 건설했는데 경제적 타당성이 있었기 때문에 공공금융기관인 ADB에서 2,500만 달러를 차입할 수가 있었다. 국제경쟁력 있는 공장을 건설할 수 있는 「엔지니어링 어프로치」를 하는 것이 차관을 얻을 수 있는 관건이 되는 것이다)

가장 훌륭한 공장을 값싸게 건설하는 방법은 국제 입찰에 붙이는 길인데, 이 때 각 국의 수출입은행에서 상업차관을 얻어오면 이 문제는 해결된다. 상업차관이란 각 나라마다 수출을 장려하기 위해 마련한 제도이기 때문이다. 사업성만 건실하면 차관이 가능하다는 것은 석유화학 건설에서 이미 충분히 입증되었다.

그런데 컨소시엄식 차관에서는 순서가 완전히 거꾸로이다. 기계장치의 공급자를 먼저 결정하고 난 후 이들을 상대로 교섭을 하게 되니 입찰방식은 처음부터 배제하는 방식이 되는 것이다. 그래서 컨소시엄식 차관으로 최신식 공장을 값싸게 건설한다는 것은 절대로 불가능하다. (이상)

나는 호텔로 돌아오자마자 박충훈 부총리(김학렬 경제수석 동석)에게 이 사실을 보고했다. 그리고 다음날 아침 귀국하는 길에 공항에서 기다리고 있던 박태준 사장에게도 그간의 경유와 생각을 말해주었다. 좀 긴 시간에 걸친 설명이었는데도 朴 사장은 시종 진지한 표정으로 경청은 했으나, 걱정 때문인지 표정은 밝지가 않았다(註 : 나는 당시 상공부 기획관리실장으로서 국영기업체인 대한중석(포항제철에 20% 투자한 대주주. 사장 : 박태준)을 관장하고 실질적인 주주역할을 하고 있었다).

종합제철 건설사업에 대한 엔지니어링 작업

5월 7일 귀국한 朴 부총리는 'KISA와의 협력계약을 포기하고 대일청구권자금 등 재정차관으로 건설하는 것이 좋겠다고 상부에 건의했다'라고 나온다(註 : 아래 박충훈 회고록 참조).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같은 해 6월 2일 朴 부총리는 퇴진하고 김학렬 경제수석이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취임했다. 이 시점으로부터 종합제철은 대일청구권자금을 활용하는 방향으로 급선회하게 된다.

새로 취임한 김학렬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은 부총리실에 들어서자마자 흑판에 「종합제철건설」이라고 크게 쓰고 종합제철이 완공되거나, 자기가 퇴임하기 전에는 절대로 지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朴 대통령으로부터 종합제철건설 책임자로 임명받았다는 뜻이었다.

朴 대통령의 특별지시에 따라 6월 7일 金 부총리는 경제기획원 내에 「종합제철 건설 전담반」을 설치하고 새로운 종합제철 건설계획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주된 내용은 경제적 및 기술적 타당성을 마련하는 것이었는데, 기술적인 문제는 포항종합제철(株)에서 기술진을 동원, 일본의 제철소를 견학하고 토의를 거치면서 기본골격을 수립했다.

비로서 엔지니어링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는 뜻이다. 나도 ―1970년 1월 28일 광공전 차관보로 부임― 종합제철 건설사업도 나의 소관업무가 되었으므로 수시로 체크했다(註 : 1973년 1월 ―중화학공업정책선언 후는― 종합제철건설 사업은 중화학공업계획단에서 주관하게 됐다). 종합제철건설안은 그 후 몇 차례의 수정을 거쳐 최종적으로 다음과 같이 확정되었다.

기본방침 : 국제경쟁력있는 제품생산

(1) 최신공법 채택 : 컨소시엄 방식 차관 절대 배격

(2) 국제규모의 공장 건설 :

1) 선철 제조 규모 연산 60만 톤 대신 100만 톤으로 확장
2) 제강공장은 130~150만 톤 LD전로, 압연공장에는 150만 톤 용량의 압연기 설치 (註 : 이러한 용량은 당시 일본에도 없는 최신식 대규모 시설이었다.)
3) 생산품목은 「다량소품종생산」방식으로 변경 (註 : 대량생산을 하면 생산비가 싸진다.)

(3) 건설비 절감 : 국제 입찰 방식

(4) 경영건설화 :

1) 정부지원 : 항만시설, 토목, 준설, 공업용수, 철도건설 등에 필요한 자금은 정부에서 보조 (註 : 정부 보조이기 때문에 공장 건설비에는 포함되지 않는다.)

2) 출자 : 건설자금 중 내자(230억원)는 전액 정부에서 출자하고, 종합제철 건설에 투입된 대일 청구권 자금 중 무상 3,080만 달러도 출자금으로 전입 (註 : 이로써 포항제철(株)은 100만 톤 공장이 준공되어 정상가동에 들어간 1974년, 자기자본비율이 47.7%로 약 50%가 됐다. 이자도 없고 상환할 필요도 없는 투자자금의 비율이 50%나 된다는 뜻이다.)

3) 차관 : 대일청구권 자금 중 유상 4,290만 달러를 사용 (註 : 이자가 거의 없고 장기상환이 가능하다), 일본의 수출입은행에서 상업차관으로 5천만 달러를 확보 (註 : 자금 확보를 한 후에 경쟁입찰을 하게 되므로 좋은 기계 설비를 싸게 구매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종합제철을 건설하기 위해 정부는 모든 지원조치를 취했는데 이렇게 적극적인 지원은 전무후무한 일이었다. 포항제철 건설에 대한 일본측의 태도는, 철강업계(경제계)는 처음부터 적극적이었던 반면 일본 정부(외무 및 대장성)와 정치계는 소극적이었다. 그래서 정문도 차관보와 양윤세 투자진흥관이 일본 정부와 교섭을 하느라고 많은 고생을 했다.

8월 26일에는 동경에서 제3차 한일각료회담이 개최돼서 金 부총리가 수석 대표로서 참석했는데, 이 회의에서 金 부총리는 조세협정을 양보하고 종합제철 협력에 가조인을 하게 됐다. 동년 9월에 일본 정부에서 파견된 조사단(단장 : 赤澤璋一 경제기획청 조정국장)은 "포항종합제철 건설계획(당시는 기본골격)이 타당하며 기술적 난점이 없다"는 평가를 했다.

한달 후에는 IBRD 조사단도 내한했는데, 단장은 ―IECOK 3차 총회 때 의장직을 맡아 KISA 안에 반대했던― 굿맨(Goodman) 씨였다. 10일 간의 조사 끝에 제출한 보고는 "한국은 철강수급 면으로 보아 종합제철공장을 건설할 필요성이 있으며 사업 계획상 기술적인 면에서도 타당성이 있다.

다만 경제성 문제에 대해서는 자금을 제공키로 되어 있는 일본측의 구체적인 계약서가 나와 있지 않아 평가를 하지 못하였다"라는 것으로 일본측으로부터 유리한 자금협력만 얻을 수 있다면 타당성이 있다는 긍정적인 결론이었다. 사업을 착수하기 전에 완벽한 엔지니어링 작업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단적으로 증명해 주는 대목이다.

드디어 1969년 12월 3일 金 부총리와 가네야마(金山正英) 주한 일본대사 간에 「기본협약」에 서명을 함으로써 자금문제가 해결됐다. 포항종합제철의 기공식은 1970년 4월 1일에 성대하게 거행됐고, 3년 3개월 후인 1973년 7월 3일에 준공식을 가졌다. 울산석유화학이 준공된 지 9개월 후였다. 그리고 포항종합제철에서는 첫해부터 흑자가 났다.

여기서 1980년에 있었던 후일담 하나를 소개한다. 맥나마라 IBRD 총재가 동은행 김형기(金瀅基) 이사(註 : 과학기술처 국장 출신으로 문교부 차관 역임)에게 진지한 표정으로 "포항제철(KISA 안)에 대해 적극적으로 반대한 것에 대해 대단히 미안하게 생각한다. 브라질의 제철소에 대해서는 IBRD에서 자금을 제공했는데 브라질 제철소는 부실기업이 됐다. 어떻게 한국에서는 성공했는지 그 비밀을 알고 싶다"라는 질문을 하더라는 것이다. 이에 대한 답변을 나에게 하라고 한다면 다음과 같이 했을 것이다. "KISA 안대로 추진했더라면 포항제철도 부실화 됐을 것이다. 그러니 KISA 안에 대해서 총재가 반대한 것은 당연했으며, 반대해준 데 대해 한국 국민으로서 오히려 감사하게 생각한다. 포항제철이 성공할 수 있었던 이유는 사전에 「엔지니어링 작업」을 치밀하게 한 데 있다."

산업혁명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역할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행정직 공무원이 국가경영의 주역이었다.

1961년 5월 16일 군사혁명이 일어났다. 상공부 장관으로 부임하는 정래혁(丁來赫) 육군소장은 일본 육군사관학교 출신, 즉 이공학(理工學)계 출신이었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작성하자면 기술자를 중용할 수밖에 없다는 판단을 내렸다. 당시 상공부의 「국장급 이상의 진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차관보급은 두 명 모두, 국장급은 4명 중 3명이 기술관료이니 당시 상공부에는 기술관료가 주로 포진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보면 우리나라에서 테크노크라트의 씨가 뿌려진 때는 혁명정부 초기였으며 씨를 뿌린 사람은 정래혁 장관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이들 중 박충훈 차관, 함인영 차관보, 최형섭 광무국장, 이태현 공업국장, 그리고 박승엽 과장과 화학과장인 본인 등은 1950년 한국전쟁이 발발하던 해 12월 공군기술장교 후보생으로 입대해서 함께 교육받은 동기생들이다(註 : 졸저 한국형 경제건설, 제5권, p.471 참조).

그리고 공군장교로서 근무하면서 美 공군식 행정을 몸에 익힌 인사들이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이들 테크노크라트들은 미국 공군식 교육이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테크노크라트가 기술자 출신이어야만 한다는 뜻은 아니다.

우리나라의 공무원은 행정직 공무원과 기술직 공무원으로 양분돼 있었는데, 기술직 공무원은 지위가 낮아 질수록 취급분야가 세분화돼서 기사(技士)급이 되면 ―예컨대 시멘트만을 담당하든가 혹은 비료만을 담당하게 되어 있으니― 해당 분야의 기술밖에 파악하지 못했다.

그리고 정책을 다룰 기회가 없으니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는 없다. 과장급인 기정(技正)이 되면 정책을 수립해야 하는 책임이 있었으나 당시에는 행정이나 법률 또는 경제 전반에 대한 지식이 부족했고 사고 방식이나 행동 양식이 기술자적 고집을 버리지 못했기 때문에 시야가 좁다는 평을 들을 수밖에 없었다. 그러니 당시까지만 해도 진정한 테크노크라트라고 하기에는 거리가 있었다.

한편 행정직 공무원은 기술에 관계되는 일은 으레 기술직 공무원의 전담 분야라고 생각하고 기술적 상식을 흡수하는 데 게을리 했으니 이들 또한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가 없었다. 결국 60년대 초반까지는 행정직 공무원이나 기술직 공무원은 존재했으나 양자를 겸비한 전형적 테크노크라트는 없었다는 뜻이 된다.

그러나 이들 기술 관료들은 5개년 계획을 추진해가면서 차차로 경험을 쌓아 테크노크라트로서 성장해갔다. 일방 행정직 공무원도 기술과에 근무하는 동안 기술 지식을 흡수해 가면서 상공부형 테크노크라트로 변신해 갔다. 특히 법학(法學)을 전공한 공무원은 사고방식이 논리적이기 때문에 적응력이 컸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한다면 상공부형 테크노크라트의 발생 출발점은 1960년대 초반의 과장급에서 찾아야 한다고 할 수 있다. 어떤 나라의 정부이든 간에 정부의 과장급은 소관 업무에 대해 정책을 수립하고 집행하는 책임이 있다. 국장급은 수립된 계획을 검토, 보완하고 상부기관에 건의하며, 장차관은 이의 가부를 결정하게 된다.

그리고 아주 중요한 사항은 대통령에게까지 보고되는데 결국은 과장이 수립한 계획이 국가원수까지 올라간다는 뜻이 된다. 결재문서의 기안자도 중요한 사항은 과장 명의로 하고 브리핑도 과장급이 한다. 그러니 과장급은 정부의 중핵간부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국장급이 되면 기술보다는 정책판단 능력이 더 요구되고, 직위가 더욱 올라가면 정책판단이 위주가 되며, 장차관(長次官)급이 되면 정치적 배려까지도 해야 한다.

다만 「테크노크라트」라면 기술적 요소가 판단의 기초가 된다는 점에는 변함이 없다. 이런 입장에서 생각하면 기술지식이 없는 관료는 테크노크라트라고는 할 수가 없다.

예로 장차관급은 기술적 판단능력만 있으면 테크노크라트라고 할 수 있는데, 상공부나 과학기술처 장관일지라도 기술문제를 소홀히 하는 사람은 테크노크라트가 아니다. 요약하면 진정한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요소와 정책적 요소를 두루 고려할 수 있는 폭넓은 시야와 능력을 갖추어야 하는 것이다.

정래혁 장관은 기술자를 중용했는데 박충훈(朴忠勳) 및 김정렴(金正濂) 장관도 기술자를 우대했다. 기술적 판단은 테크노크라트에게 맡겼다. 진급이나 인사배치 때도 행정직과 기술직 비율을 5 : 5로 했다. 이런 환경 속에서 상공부의 관료들은 테크노크라트로서 크게 성장, 이들이 우리나라 산업혁명의 주역이 돼 나간다. 나도 여기에 포함된다.

朴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였다.

朴 대통령은 정기사관학교 출신이다. 더욱이 朴 대통령은 포병 출신이다. 포병은 화포와 각종 포탄의 성능을 숙지해야 하고, 포탄을 명중시키려면 독도법(讀圖法), 측량법(測量法), 삼각법(三角法) 등에 숙달해서 발사 때마다 탄착점을 계산해낼 수 있는 능력이 있어야 한다.

즉 포병은 기술자인 것이다. 한 예로 朴 대통령은 헬기를 타고 지방에 갈 때 동승한 장관이 지도를 보고 있으면 "지금 어느 지점에 와 있는지 아느냐?"고 물어볼 때가 가끔 있었다. 장관이 답변을 못하면 지도를 손으로 집어가며 현재의 위치를 가리키곤 했다. 헬기에서 현재의 비행위치를 안다는 것은 독도법에 숙달되지 못하면 불가능한 일이다. 그리고 朴 대통령은 경부고속도로를 직접 설계할만한 실력도 갖고 있었다.

더욱이 朴 대통령은 군에서 정보와 작전계통에 복무했다. 작전계획이라는 것은 승리하기 위한 계획으로 마이크로(Micro)적 기법에 속한다. 엔지니어링 기법과는 이윤을 추구한다는 점이 다를 뿐 상통하는 점이 많다.

朴 대통령은 1차 5개년 계획 착수 때부터 각 단위 사업에 대해 깊은 관심을 표했고 세부적 기술내용까지 파악했다. 한 예로 제1차 5개년 계획 사업에 포함된 시멘트공장 건설 시 용수문제로 시끄러울 때 직접 그 일에 관여하고 판단을 내렸다는 것은 이미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 후에도 공장건설에 관한 기술문제가 나오면 내가 불려갔고, 브리핑할 때에도 기술문제에 대해서는 소상히 보고했다. 이럴 때 납득되지 않는 기술적인 문제점이 있으면 朴 대통령은 자주 질문을 던지곤 했다. 그리고 기술자들은 기술자 특유의 고집이 있는지라 朴 대통령 면전에서 기술적인 토론이 벌어질 때도 있었는데, 朴 대통령은 끝까지 경청을 하고 난 후 단안을 내렸다.

朴 대통령은 기술적인 문제에 대해서 각부 장관이나 정치가, 기자들에게 자주 설명을 하곤 했는데 틀린 적이 없었다. 이럴 때에는 기술적 지식이 없는 인사는 묵묵부답일 수밖에 없었다.

울산 석유화학단지 준공식 때는 열차편을 사용했는데 동석한 장관들에게 「석유화학에서 나오는 제품명(즉 공장명)을 말해보라」고 했다. 각 장관은 2~3개 공장밖에 대답하지 못했는데 이 중에는 틀리는 것도 있었다. 이럴 때마다 朴 대통령은 시정했다(註 : 당시 상공장관 김정렴<金正濂>만이 겨우 완전히 대답해서 체면을 지켰다).

朴 대통령은 공업단지를 지정할 때에는 꼭 사전에 현지답사를 했고, 이때 여러 가지 지시를 했다. 그리고 건설기간 중, 그리고 공장가동 후 자주 현장을 방문했는데 여기서 공장 기술자로부터 설명을 듣고 질의응답을 통해 현장 경험을 쌓아갔다.

이러한 일들은 비단 공업분야 뿐만 아니라, 농수산업분야, 토목, 건설 등 각종 사회간접시설, 각종 연구소, 교육기관, 군사분야 등 국정전반에 걸쳤고, 朴 대통령은 이러한 경험을 장기간 쌓아감에 따라 실무경험이 높아질 수 밖에 없었다. 그 결과 朴 대통령은 각종 기술적 사안에 대해서조차 자신있게 최종판단을 내릴 수 있었고, 제반지시사항을 하달할 수 있었다.

그리고 수명받은 부하들은 믿고 순종했던 것이다. 또한 朴 대통령만큼 기능공 및 기술자, 과학자의 중요성을 인식하고 이들 양성에 전력투구를 한 국가원수는 찾아볼 수가 없다. 1972년에는 국민의 과학화선언을 했고 각종 연구소를 손수 설립했다. 이런 관점에서 본다면 朴 대통령은 완벽한 테크노크라트였다고 보아야 한다.

산업혁명을 이끌어간 경제총수

테크노크라트적인 경제 총수나 장관이란 어떤 사람인가? 이것은 반드시 과학자나 기술자가 되어야 한다는 뜻은 아닐 것이다. 어떤 과학기술자도 자기 전문분야의 지식밖에 없으니 이러한 문제는 다른 전문가에게 맡겨야 한다.

과장급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지식을 기반으로 해서 다른 전문가의 자문을 들어가면서 엔지니어링적 기법을 도입해서 행정적인 정책을 마련해야 하는데 고위층 테크노크라트가 될수록 판단만 하면 된다. 그러나 과학기술의 지식 없이는 정확한 판단을 할 수 없다는 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지식은 단시일에 얻어지는 것이 아니고, 오랜 실무경험과 기술을 알고자 하는 노력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그리고 테크노크라트의 중요성에 대한 인식과 배려가 있어야 가능한 것이다.

박충훈(朴忠勳) 장관은 1967년 10월 30일 경제기획원 장관으로 영전할 때까지 3년 5개월을 상공부에서 근무했고, 김정렴(金正濂) 차관은 1966년 1월 26일까지 1년 7개월을 근무한 후 ―재무부 장관으로 영전했다가― 박충훈 장관의 뒤를 이어 다시 상공부 장관으로 취임, 69년 11월 3일까지 2년간 근무했으니 상공부에 3년 7개월 근무했다는 계산이 나온다.

우리나라 경제사상 가장 획기적인 전환점이 된 공업의 수출화 개편 과정에서, 그리고 석유화학, 종합제철 등 1~2차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추진하는 시기에, 朴 장관은 상공부에 3년 5개월, 金 장관은 3년 7개월을 근무함으로써 기술 및 공업적 지식을 충분히 흡수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술적 문제는 기술적 기초하에서 판단을 내렸으니 두 분은 상공부형 테크노크라트의 범주에 속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상공부 재직 후 朴 장관은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장관으로서 1년 8개월을 경제총수로 일했다. 그리고 1969년 6월 김학렬(金鶴烈) 부총리가 취임했는데 4개월 후인 1969년 10월 김정렴(金正濂) 상공부 장관이 대통령 비서실장으로 임명됐다.

임명장 수여 때 朴 대통령은 金 실장에게 "경제는 임자가 맡으시오"라고 했으니, 이 때부터 ―상공부 출신 테크노크라트인― 김정렴 실장이 경제 총수인 시대로 들어간다(註 : 통상적으로는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이 경제총수인데, 김정렴 비서실장 시대에는 金 실장이 경제총수였다는 뜻이다). 김정렴 비서실장 시대는 9년 1개월 계속 됐다.

결국 朴 대통령 시절에는 경제기획원 출신인 이코노크라트(金鶴烈)가 우리나라의 경제 총수로 일했던 시기는 1969년 6월부터 69년 10월까지 약 4개월뿐이라는 뜻이 된다.

아래 표는 우리나라의 산업혁명 각 단계에서의 경제총수의 명단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 표를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을 주도한 사령관은 朴 대통령 자신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각 단계별로 보면,

제1단계는 실물경제에 밝고, 마이크로정책적이고, 테크노크라트적이기도한 장기영 부총리시대(3년 5개월).

제2단계는 상공부형 테크노크라트인 박충훈 부총리시대(1년 7개월), 경제기획원형 이코노크라트인 김학렬시대(4개월), 상공부형 테크노크라트인 김정렴시대(1년 2개월).

제3단계는 김정렴시대(7년)로서 이 기간중에 100억 달러 수출, 1,000억 달러 국민소득이라는 대 역사를 이룩한다.

제3~4단계는 朴 대통령의 서거로 다음 세대로 이어진다.

이 표를 보면 우리나라의 산업혁명은 김학렬 부총리시대(4개월)를 빼고는, 朴 대통령이라는 테크노크라트 밑에서 장기영, 박충훈, 김정렴의 테크노크라트형 경제총수가 주역을 담당했다는 것을 알 수가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1960~70년대의 우리나라 역사상 전무후무한 「테크노크라트의 시대」였다고 할 수가 있다. 그러나 朴 대통령의 서거 후, 전두환 행정부에서는 테크노크라트를 완전히 거세해 버렸다. 이때부터 이코노크라트의 전제 시대가 개막된다.

1962년 이후 70년대 말까지 경제기획원 차관을 지낸 분들의 그 후 경력을 알아본다.

다음의 표를 보면 9명의 차관은 모두 경제부처의 장관으로 임명됐는데 그중 4명이 상공부 장관으로 부임했다. 부총리 겸 경제기획원 장관까지 승진한 인사도 4명이나 된다. 경제기획원의 이코노크라트는 차관까지 진급하고 난 후에는 각 부처의 장관으로 영전되어 경제기획원은 장관양성소의 역할을 했다.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이런 상황이 계속되면서 테크노크라트의 씨는 말라버렸다. 「테크노크라트와 이코노크라트」라는 쌍두마차로 이끌던 우리나라 경제는 이코노크라트의 독주로 지금에 이르게 된다. 그러나 우리나라와 경쟁국 관계에 있는 대만이나 중국은 테크노크라트에 대한 인식이 근본적으로 다르다.

대만 정부 각료에는 이공계 출신이 많다.

대만에서는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경영에 중요한 몫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1980년 당시의 예를 들면 국무총리가 전기공학, 경제부 장관이 화학공학, 재무부 장관이 토목공학, 무임소 장관 한사람은 물리학 전공, 또 한 사람의 무임소 장관은 기계공학 전공이다. 더구나 대만 국영기업체 장은 거의가 기술자들이다. 

 
   
  ▲ 박정희 대통령은 테크노크라트 였다
현재는 물질문명 내지는 정보시대라고 한다. 인류는 과학기술이 기초가 되는 시대에 살고 있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국가를 경영하는 정책 담당자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판단을 내려야 함은 당연한 이치이다. 「테크노크라트」는 바로 이러한 부류의 관료이다. 테크노크라트는 「기술적 기초 위에서 국가정책을 다루는 공무원」이란 뜻이다.
ⓒ 뉴스타운, 박정희대통령기념사업회
 
 

중국의 국가원수는 이공계 출신으로 이어질 것이다.

전 국가 주석 리펑(李鵬), 현 국가 주석 장쩌민(江澤民)은 이학(理學) 또는 농공(農工)계 출신이고, 다음주자가 될 주룽지(朱鎔基), 후진타오(胡錦濤) 모두가 이공계 출신의 테크노크라트이다.

덩샤오핑(鄧小平) 주석이 마오쩌둥(毛澤東)에 배반한 린뱌오(林彪), 국가보다는 정권에 욕심이 많은 장칭(江靑) 등을 보고 현 중국을 부강하게 하기 위해서는 원리원칙에 입각해서 사리 판단하는 테크노크라트가 국가 경영을 맡는 것이 좋겠다는 판단을 내린 결과라고 한다. 여하간 대만과 중국은 눈부시게 발전하고 있다.

다음(5장)에는 한국형 경제건설의 기본이념인 산업혁명과 엔지니어링 어프로치에 대해서 좀더 깊이 살펴보기로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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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종철 2006-06-20 16:28:11
너무 많은 량 한번에 올려 놓아서 누가 요즘처럼 바쁜 세상에 정독 하겠습니까? 좋은 글인줄 알지만 너무하네요.

익명 2006-06-20 16:29:45
시간을 들여서 천천히 읽어보세요.
시대의 흐름을 읽는데 도움이 될겁니다.

만타마너 2006-06-20 17:03:18
으이구. 왠 양이 이렇게 많아?
와~~~ 시간 없는 사람 읽기가 버겁네.
좀 쪼개서 하면 안되나?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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