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의 개항과 병인양요(上)
스크롤 이동 상태바
조선의 개항과 병인양요(上)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다시 보는 한국 근현대사 - 학술 마을지기 을파소님

1866년 7월, 병인박해 속에서 간신히 살아남아 탈출에 성공한 리델 신부의 보고를 접한 중국주재 프랑스 공사관은 본국의 훈령과는 일고의 연관도 없이 대 조선/중국 강경책을 선포,마침내 1866년 7월 13일에 이르러 조선에 대한 선전포고에 가까운 외교문서를 중국 총리각국사무아문에 발송하였다.

그리고 역시 리델 신부의 보고를 접한 프랑스 아시아함대 극동분함대 사령관 피에르 구스타뷔 로즈 제독은 조선에 대한 보복원정을 결심하고 이에 앞서 사전정찰의 목적으로 양력으로 9월 18일, 음력으로는 한가위를 하루 앞두고 순양함 프리모게호와 포함 타르디프호, 통신보급함 데룰레데호 등 세 척의 배를 이끌고 조선에 접근한다. 이 중 데룰레데호가 강화도 초지진을 거쳐 물치도까지 들어와 정박하자 영종첨사 심영규가 이 배에 대한 문정을 시도하다가 데룰레데호 측의 거부로 실패하였다.

데룰레데호는 다시 다른 배들과 합류한 뒤 함대 전체가 이동을 실시하여 대형선박이라 내륙수로로 접근하기 어려운 프리모게호는 물치도에서 정박하고 데룰레데호와 타르디프호가 한강으로 진입하였다. 이에 김포군수 정기화가 문정을 실시하여 이 이양선들의 국적이 프랑스 임을 확인한다. 그리고 내항목적에 프랑스 측은 조선의 산천을 유람하러 왔을 뿐 해를 입힐 의도는 없다면서 물자공급을 요구한다. 그리고 두 척의 배는 계속 한강을 거슬러 올라와 양천현에 이르고 이에 양천현령 윤수연이 문정을 실시, 물자를 공급해준다. 하지만 그 후에도 물러나지 않고 계속 올라와 도성의 턱밑이라 할 서강에 이르게 된다.

조정에서는 어영중군 이용희에게 훈국 마차 이초, 보군 칠초-여기에서 초는 오늘날 중대급에 해당하는 부대단위이다. 즉 마차 이초는 기병 2개 중대, 보군 칠초는 보병 7개 중대에 해당한다-서강 일대의 경계를 강화하게 하고, 훈련대장 이경하에게는 금위대장과 함께 대궐을 호위하게 하는 등의 대응책을 마련한다.

한강으로 거슬러온 두 척의 군함은 결국 다시 하강을 실시하여 바다로 빠져나간다. 이 때 프랑스 함대가 별다른 도발없이 물러난 것은 조선군의 경계태세가 강화된 상태에서 충돌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에 이것이 본격원정에 앞선 사전정찰으로서 한강 일대의 수심측정 등의 기본자료를 축적할 수 있었기에 일단 물러난 것이다.^

이후 조선에서는 프랑스 함대가 정박하였던 양화진 근처의 야산에서 천주교 신자를 처형하는데 그 후 이 산의 이름은 '머리를 자르는 산'이란 뜻의 절두산이 되어 한국 천주교에서는 대표적인 순교지로 기록되고 있다.

한편 로즈 제독은 조선에 대한 정찰에서 복귀한 지 이틀 뒤인 10월 5일, 공사관측과의 치열한 설전 끝에 단독으로 한강 봉쇄를 선언하는 공문(이른바 "The Blockade of the Salee River" 또는 "한강봉쇄령"이라고 불리우는 "강화해협 봉쇄령"이다)을 중국 정부 및 각국 공사관에 발송한다.

그리고 지난 원정에서 작성항 해도 3장을 기본으로 하여 강화도 일대에서의 국지전과 필요시 수도 한양까지 타격하는 작전안을 확립하고 10월 11일 영국 해군의 묵인 내지 실질적인 협조 아래 전함 게리에르, 순양함 타르디프와 라플라스, 포함 타르디프와 르 브레톤, 통신보급함 데룰레데와 켄시앙 이렇게 총 7척의 군함과 해병대 600명을 포함한 1520 명의 전력을 이끌고 조선에서 탈출한 리델 신부와 조선인 천주교 신자 최신일, 최인서, 심순녀 등을 안내인으로 삼아서 중국 치푸항을 출발하여 14일에 강화도 인근 해역에 도착하여 수병 90명과 포함 및 통보함 5척을 이끌고 갑곶진을 점령한다.

그리고 15일에는 프랑스군은 위력정찰의 성격으로 강화성을 공격하였다. 이에 강화유수 이인기는 성내에 있던 숙종과 영조의 어진을 대피시킨 후 본격전투준비에 돌입하지만 16일에 있은 프랑스군의 공세에 결국 함락된다.

이에 대응하여 조선 정부측은 10월 16일 기보연해순무영(이하 순무영)을 창설하고 도순무사겸 경기도관찰사 겸 경기도 병마절도사로 훈련대장 이경하, 순무중군에 훈련도감 중군 이용희, 순무천총에 주교도청 양헌수 등을 임명, 총 병력 2천여의 직접 토벌군을 편성하는 한편, 총융청과 수어청 등의 군사를 한강 주변에서 기동전력으로 배치하여 총 군세 1만여 명의 방어준비태세를 갖추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메인페이지가 로드 됐습니다.
가장많이본 기사
칼럼/수첩/발언대/인터뷰
방송뉴스 포토뉴스
오피니언  
연재코너  
지역뉴스
공지사항
손상윤의 나사랑과 정의를···
뉴스타운TV 기사보기